[부일시론] 부산과 후쿠오카, 교류에서 협력 파트너로
/ 마쓰바라 다카토시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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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바라 다카토시
마쓰바라 다카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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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겨울. 부산을 직접 보겠다는 마음에 부산이 보이는 일본 쓰시마 북단을 여행했다. 이틀만에 겨우 부산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광안대교 조명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새삼 한일 간의 지리적 근접성을 실감했다.복잡한 한일 관계 속에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오랫동안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김치와 불고기'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한일문화 교류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로서 이런 한국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계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2004년 욘사마 붐'이라고 본다.한일 교류의 주역은 바로 시민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때의 광경은 지금 선명하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한국의 '붉은 악마'와 일본 응원단이 펼치는 양국의 응원전. 도쿄 하네다 공항에 늘어선 5천여 일본 여성팬들이 '욘사마'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광경. 이러한 모습은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즉 21세기를 이끌어 갈 한일 교류의 주역은 정부가 아니며, 도쿄나 서울도 아니며, 시민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지역과 지역 간의 시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어느 날 개인적으로 친한 동서대 장제국 교수가 후쿠오카 규슈대를 찾았다. 그는 한일 차세대 연구자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국제 정치학자인 그의 열변에 어느 순간부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장 교수의 소개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미야지마 아키오 공사(현 유엔 근무)는 "후쿠오카와 부산이 가까워질 수 있는 대화 채널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조언했다.2006년 봄, 장 교수를 만나 서로의 꿈을 얘기했을 때다. 그 자리에서 미야지마 공사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장 교수가 "부산·후쿠오카 간의 포럼을 만들어 대화의 채널을 실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행정에 관한 양국 도시 상호 간의 의견제안 및 대등한 관계 유지, 그리고 상호 윈-윈 관계를 도모하자는 것이 합의 사항이었다. 나는 후쿠오카로 돌아와 당시 요시다 히로시 서일본신문 경제부장(현 후쿠오카 시장)과 함께 JR규슈 이시하라 스스무 사장(현 회장)을 방문해 포럼의 후쿠오카측 대표로 취임해주기를 의뢰했다. 한편 장 교수는 부산으로 돌아가 김종렬 부산일보 사장으로부터 부산측 대표 취임 승낙을 얻었다. 각각의 대표에 의해서 선출된 회원 11명씩으로 구성된 '부산·후쿠오카 포럼'은 그해 9월에 출범했다. 지금까지 3회에 걸친 회의가 양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그간 토론에서 회원 22명이 내린 결론은 '대화의 채널'을 계속적으로 유지할 것과 '교류에서 협력으로, 그리고 파트너'의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도록 부산과 후쿠오카 시민 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를 한층 더 도모하자는 것이다.덧붙여 이러한 지역 제휴를 구상하기 위해 스웨덴과 덴마크 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오르슨드 지역 제휴의 벤치마킹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 공약 중 하나였던 '초광역 경제권 구상'이 공표되어 부산·후쿠오카의 지역 제휴를 추진하는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부산 Day' 처럼 '후쿠오카 Day'도 정했으면게다가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점차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 전략은 일본을 앞서가고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구상,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 삼성을 중심으로 한 IT산업 발전, 영화상품 전시회장으로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 부산국제영화제, 조기 영어교육 도입 등에 후쿠오카 시민들은 놀라고 있다.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부산·후쿠오카 포럼은 상호 도시 간의 지역 제휴 추진을 위해 '2009 부산·후쿠오카 우정의 해' 지정, 경제협력협의회 설치, 아시아 게이트웨이 구상 등을 부산과 후쿠오카 시장에 제안했다. 이 제안들이 받아들여져 부산과 후쿠오카시는 그 실현을 위해 정책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또 부산·후쿠오카 대학 간의 컨소시엄이 결성돼(2008년 9월 현재 24개 대학 가맹) 학점교환제도 도입, 공동 과목설정, 부산·후쿠오카 간의 각종 스포츠 대항전 등이 계획 중이다.'2009 부산·후쿠오카 우정의 해'를 계기로 후쿠오카에서는 시민 주체의 페스티벌도 개최된다. 9월 20일은 '부산 Day'로 정해졌다. 후쿠오카의 거리 전체에 '부산'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한편 조선통신사 행렬도 재현된다. 2010년에는 부산에서 '후쿠오카 Day'가 개최되면 좋겠다. 그때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민속예능인 '야마가사(山笠)'가 부산의 거리를 누비며 부산시민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받게 되기를 기원한다.
몇 해 전 겨울. 부산을 직접 보겠다는 마음에 부산이 보이는 일본 쓰시마 북단을 여행했다. 이틀만에 겨우 부산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광안대교 조명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새삼 한일 간의 지리적 근접성을 실감했다.복잡한 한일 관계 속에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오랫동안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김치와 불고기'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한일문화 교류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로서 이런 한국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계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2004년 욘사마 붐'이라고 본다.한일 교류의 주역은 바로 시민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때의 광경은 지금 선명하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한국의 '붉은 악마'와 일본 응원단이 펼치는 양국의 응원전. 도쿄 하네다 공항에 늘어선 5천여 일본 여성팬들이 '욘사마'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광경. 이러한 모습은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즉 21세기를 이끌어 갈 한일 교류의 주역은 정부가 아니며, 도쿄나 서울도 아니며, 시민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지역과 지역 간의 시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어느 날 개인적으로 친한 동서대 장제국 교수가 후쿠오카 규슈대를 찾았다. 그는 한일 차세대 연구자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국제 정치학자인 그의 열변에 어느 순간부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장 교수의 소개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미야지마 아키오 공사(현 유엔 근무)는 "후쿠오카와 부산이 가까워질 수 있는 대화 채널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조언했다.2006년 봄, 장 교수를 만나 서로의 꿈을 얘기했을 때다. 그 자리에서 미야지마 공사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장 교수가 "부산·후쿠오카 간의 포럼을 만들어 대화의 채널을 실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행정에 관한 양국 도시 상호 간의 의견제안 및 대등한 관계 유지, 그리고 상호 윈-윈 관계를 도모하자는 것이 합의 사항이었다. 나는 후쿠오카로 돌아와 당시 요시다 히로시 서일본신문 경제부장(현 후쿠오카 시장)과 함께 JR규슈 이시하라 스스무 사장(현 회장)을 방문해 포럼의 후쿠오카측 대표로 취임해주기를 의뢰했다. 한편 장 교수는 부산으로 돌아가 김종렬 부산일보 사장으로부터 부산측 대표 취임 승낙을 얻었다. 각각의 대표에 의해서 선출된 회원 11명씩으로 구성된 '부산·후쿠오카 포럼'은 그해 9월에 출범했다. 지금까지 3회에 걸친 회의가 양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그간 토론에서 회원 22명이 내린 결론은 '대화의 채널'을 계속적으로 유지할 것과 '교류에서 협력으로, 그리고 파트너'의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도록 부산과 후쿠오카 시민 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를 한층 더 도모하자는 것이다.덧붙여 이러한 지역 제휴를 구상하기 위해 스웨덴과 덴마크 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오르슨드 지역 제휴의 벤치마킹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 공약 중 하나였던 '초광역 경제권 구상'이 공표되어 부산·후쿠오카의 지역 제휴를 추진하는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부산 Day' 처럼 '후쿠오카 Day'도 정했으면게다가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점차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 전략은 일본을 앞서가고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구상,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 삼성을 중심으로 한 IT산업 발전, 영화상품 전시회장으로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 부산국제영화제, 조기 영어교육 도입 등에 후쿠오카 시민들은 놀라고 있다.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부산·후쿠오카 포럼은 상호 도시 간의 지역 제휴 추진을 위해 '2009 부산·후쿠오카 우정의 해' 지정, 경제협력협의회 설치, 아시아 게이트웨이 구상 등을 부산과 후쿠오카 시장에 제안했다. 이 제안들이 받아들여져 부산과 후쿠오카시는 그 실현을 위해 정책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또 부산·후쿠오카 대학 간의 컨소시엄이 결성돼(2008년 9월 현재 24개 대학 가맹) 학점교환제도 도입, 공동 과목설정, 부산·후쿠오카 간의 각종 스포츠 대항전 등이 계획 중이다.'2009 부산·후쿠오카 우정의 해'를 계기로 후쿠오카에서는 시민 주체의 페스티벌도 개최된다. 9월 20일은 '부산 Day'로 정해졌다. 후쿠오카의 거리 전체에 '부산'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한편 조선통신사 행렬도 재현된다. 2010년에는 부산에서 '후쿠오카 Day'가 개최되면 좋겠다. 그때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민속예능인 '야마가사(山笠)'가 부산의 거리를 누비며 부산시민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받게 되기를 기원한다.
2009年8月19日水曜日
釜山日報2009年8月「時論」
[부일시론] 새로운 패러다임의 광복절
/ 마쓰바라 다카토시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 교수
8월 15일은 한국에서는 '광복절'이며 일본에서는 '패전 기념일'이다.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1945년도의 하카타항(후쿠오카항의 별칭)과 부산항의 모습을 들 수 있다. 1945년부터 몇 년간 일본 등에서 모국으로 귀환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하카타항을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한반도에서 귀환하는 일본인은 부산항을 통해 하카타항으로 들어왔다.부산항은 '희망의 항구'당시 한국인 귀환자들에게 신국가 건설의 관문 역할을 한 부산항은 '희망의 항구'였다. 반면 일본 귀환자들에게 부산항은 폐허의 국가로 향하는 '절망의 항구'였던 것이다.1980년대에도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다. 조용필, 이성애 등이 부른 한국 대중 가요를 많은 일본인이 애창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히트곡 중의 하나였다. 부산항을 소재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별한 남녀의 러브 스토리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부산항은 '사랑의 항구'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하카타항과 부산항을 연결하는 고속선 '비틀'이 취항함으로써 쇼핑과 먹을거리, 미용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부산항은 '관광의 항구'가 되었다.여기서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창도 전 부산시립도서관장이다. 부산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립도서관이 설립된 곳이다. 한일합방 이전의 자료를 포함해 일본어로 기록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모든 도서관 자료의 공개가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인이 한국 도서관에 소장된 일본어 자료를 관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마'라고 생각되겠지만 강한 반일 감정이 빚어 낸 결과였다.더구나 소장 자료 조사팀에 일본인을 합류시키는 일은 서울대학교, 한국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례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문 관장은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봉쇄해 오던 자료를 전부 공개하고 소장 목록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일지라도 책은 인류 공통의 재산이다'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한국 국민에게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기'였다고 생각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 국민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점차 '반일감정'만으로 무장된 사고 방식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과 징병제, 창씨개명, 토지수탈 등의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의 사실의 전모를 해명하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명한 방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역사적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는 무엇인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월 15일은 '광복절'(한국)이자 '패전기념일'(일본)이다. 이 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양국이 '세계평화 공존 선언'같은 것을 도출해 세계에 강하게 어필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한국과 일본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만약 정부 차원에서 무리가 있다면 2009년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우정의 해를 제정한 예가 있듯이,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 먼저 선포하는 것은 어떨까? 또는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제안해 이미 100개 이상 맺어져 있는 한일 자매도시 간 네트워크를 연합해서 한일 양 국민에게 어필하는 것은 어떨까?그 전례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를 들 수 있다. 원자 폭탄이 투하된 8월 6일(히로시마)과 8월 9일(나가사키시)에 원폭사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핵무기 폐기와 세계평화 실현을 바라는 평화기념식이 거행되며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는 '세계평화 선언'을 발표한다.항구는 사람이나 물건이 왕래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이어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을 한다. 항구도시인 부산시와 후쿠오카시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는 한일 우호의 안내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사 영토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해협을 넘은 두 도시마저 시민 교류를 중단시켜 초등생들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 정이 돈독해 지기를 바란다. 다극화시대에서 한 나라라면 안 되는 일이라도, 한일 양국이 협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8월 15일은 한국에서는 '광복절'이며 일본에서는 '패전 기념일'이다.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1945년도의 하카타항(후쿠오카항의 별칭)과 부산항의 모습을 들 수 있다. 1945년부터 몇 년간 일본 등에서 모국으로 귀환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하카타항을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한반도에서 귀환하는 일본인은 부산항을 통해 하카타항으로 들어왔다.부산항은 '희망의 항구'당시 한국인 귀환자들에게 신국가 건설의 관문 역할을 한 부산항은 '희망의 항구'였다. 반면 일본 귀환자들에게 부산항은 폐허의 국가로 향하는 '절망의 항구'였던 것이다.1980년대에도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다. 조용필, 이성애 등이 부른 한국 대중 가요를 많은 일본인이 애창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히트곡 중의 하나였다. 부산항을 소재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별한 남녀의 러브 스토리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부산항은 '사랑의 항구'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하카타항과 부산항을 연결하는 고속선 '비틀'이 취항함으로써 쇼핑과 먹을거리, 미용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부산항은 '관광의 항구'가 되었다.여기서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창도 전 부산시립도서관장이다. 부산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립도서관이 설립된 곳이다. 한일합방 이전의 자료를 포함해 일본어로 기록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모든 도서관 자료의 공개가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인이 한국 도서관에 소장된 일본어 자료를 관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마'라고 생각되겠지만 강한 반일 감정이 빚어 낸 결과였다.더구나 소장 자료 조사팀에 일본인을 합류시키는 일은 서울대학교, 한국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례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문 관장은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봉쇄해 오던 자료를 전부 공개하고 소장 목록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일지라도 책은 인류 공통의 재산이다'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한국 국민에게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기'였다고 생각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 국민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점차 '반일감정'만으로 무장된 사고 방식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과 징병제, 창씨개명, 토지수탈 등의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의 사실의 전모를 해명하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명한 방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역사적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는 무엇인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월 15일은 '광복절'(한국)이자 '패전기념일'(일본)이다. 이 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양국이 '세계평화 공존 선언'같은 것을 도출해 세계에 강하게 어필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한국과 일본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만약 정부 차원에서 무리가 있다면 2009년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우정의 해를 제정한 예가 있듯이,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 먼저 선포하는 것은 어떨까? 또는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제안해 이미 100개 이상 맺어져 있는 한일 자매도시 간 네트워크를 연합해서 한일 양 국민에게 어필하는 것은 어떨까?그 전례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를 들 수 있다. 원자 폭탄이 투하된 8월 6일(히로시마)과 8월 9일(나가사키시)에 원폭사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핵무기 폐기와 세계평화 실현을 바라는 평화기념식이 거행되며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는 '세계평화 선언'을 발표한다.항구는 사람이나 물건이 왕래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이어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을 한다. 항구도시인 부산시와 후쿠오카시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는 한일 우호의 안내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사 영토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해협을 넘은 두 도시마저 시민 교류를 중단시켜 초등생들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 정이 돈독해 지기를 바란다. 다극화시대에서 한 나라라면 안 되는 일이라도, 한일 양국이 협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 마쓰바라 다카토시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 교수
8월 15일은 한국에서는 '광복절'이며 일본에서는 '패전 기념일'이다.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1945년도의 하카타항(후쿠오카항의 별칭)과 부산항의 모습을 들 수 있다. 1945년부터 몇 년간 일본 등에서 모국으로 귀환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하카타항을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한반도에서 귀환하는 일본인은 부산항을 통해 하카타항으로 들어왔다.부산항은 '희망의 항구'당시 한국인 귀환자들에게 신국가 건설의 관문 역할을 한 부산항은 '희망의 항구'였다. 반면 일본 귀환자들에게 부산항은 폐허의 국가로 향하는 '절망의 항구'였던 것이다.1980년대에도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다. 조용필, 이성애 등이 부른 한국 대중 가요를 많은 일본인이 애창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히트곡 중의 하나였다. 부산항을 소재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별한 남녀의 러브 스토리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부산항은 '사랑의 항구'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하카타항과 부산항을 연결하는 고속선 '비틀'이 취항함으로써 쇼핑과 먹을거리, 미용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부산항은 '관광의 항구'가 되었다.여기서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창도 전 부산시립도서관장이다. 부산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립도서관이 설립된 곳이다. 한일합방 이전의 자료를 포함해 일본어로 기록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모든 도서관 자료의 공개가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인이 한국 도서관에 소장된 일본어 자료를 관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마'라고 생각되겠지만 강한 반일 감정이 빚어 낸 결과였다.더구나 소장 자료 조사팀에 일본인을 합류시키는 일은 서울대학교, 한국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례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문 관장은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봉쇄해 오던 자료를 전부 공개하고 소장 목록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일지라도 책은 인류 공통의 재산이다'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한국 국민에게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기'였다고 생각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 국민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점차 '반일감정'만으로 무장된 사고 방식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과 징병제, 창씨개명, 토지수탈 등의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의 사실의 전모를 해명하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명한 방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역사적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는 무엇인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월 15일은 '광복절'(한국)이자 '패전기념일'(일본)이다. 이 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양국이 '세계평화 공존 선언'같은 것을 도출해 세계에 강하게 어필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한국과 일본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만약 정부 차원에서 무리가 있다면 2009년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우정의 해를 제정한 예가 있듯이,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 먼저 선포하는 것은 어떨까? 또는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제안해 이미 100개 이상 맺어져 있는 한일 자매도시 간 네트워크를 연합해서 한일 양 국민에게 어필하는 것은 어떨까?그 전례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를 들 수 있다. 원자 폭탄이 투하된 8월 6일(히로시마)과 8월 9일(나가사키시)에 원폭사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핵무기 폐기와 세계평화 실현을 바라는 평화기념식이 거행되며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는 '세계평화 선언'을 발표한다.항구는 사람이나 물건이 왕래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이어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을 한다. 항구도시인 부산시와 후쿠오카시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는 한일 우호의 안내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사 영토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해협을 넘은 두 도시마저 시민 교류를 중단시켜 초등생들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 정이 돈독해 지기를 바란다. 다극화시대에서 한 나라라면 안 되는 일이라도, 한일 양국이 협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8월 15일은 한국에서는 '광복절'이며 일본에서는 '패전 기념일'이다.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1945년도의 하카타항(후쿠오카항의 별칭)과 부산항의 모습을 들 수 있다. 1945년부터 몇 년간 일본 등에서 모국으로 귀환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하카타항을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한반도에서 귀환하는 일본인은 부산항을 통해 하카타항으로 들어왔다.부산항은 '희망의 항구'당시 한국인 귀환자들에게 신국가 건설의 관문 역할을 한 부산항은 '희망의 항구'였다. 반면 일본 귀환자들에게 부산항은 폐허의 국가로 향하는 '절망의 항구'였던 것이다.1980년대에도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다. 조용필, 이성애 등이 부른 한국 대중 가요를 많은 일본인이 애창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히트곡 중의 하나였다. 부산항을 소재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별한 남녀의 러브 스토리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부산항은 '사랑의 항구'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하카타항과 부산항을 연결하는 고속선 '비틀'이 취항함으로써 쇼핑과 먹을거리, 미용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부산항은 '관광의 항구'가 되었다.여기서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창도 전 부산시립도서관장이다. 부산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립도서관이 설립된 곳이다. 한일합방 이전의 자료를 포함해 일본어로 기록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모든 도서관 자료의 공개가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인이 한국 도서관에 소장된 일본어 자료를 관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마'라고 생각되겠지만 강한 반일 감정이 빚어 낸 결과였다.더구나 소장 자료 조사팀에 일본인을 합류시키는 일은 서울대학교, 한국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례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문 관장은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봉쇄해 오던 자료를 전부 공개하고 소장 목록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일지라도 책은 인류 공통의 재산이다'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한국 국민에게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기'였다고 생각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 국민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점차 '반일감정'만으로 무장된 사고 방식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과 징병제, 창씨개명, 토지수탈 등의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의 사실의 전모를 해명하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명한 방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역사적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는 무엇인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월 15일은 '광복절'(한국)이자 '패전기념일'(일본)이다. 이 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양국이 '세계평화 공존 선언'같은 것을 도출해 세계에 강하게 어필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한국과 일본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만약 정부 차원에서 무리가 있다면 2009년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우정의 해를 제정한 예가 있듯이,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세계평화 공존 선언'을 먼저 선포하는 것은 어떨까? 또는 부산시와 후쿠오카시가 제안해 이미 100개 이상 맺어져 있는 한일 자매도시 간 네트워크를 연합해서 한일 양 국민에게 어필하는 것은 어떨까?그 전례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를 들 수 있다. 원자 폭탄이 투하된 8월 6일(히로시마)과 8월 9일(나가사키시)에 원폭사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핵무기 폐기와 세계평화 실현을 바라는 평화기념식이 거행되며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는 '세계평화 선언'을 발표한다.항구는 사람이나 물건이 왕래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이어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을 한다. 항구도시인 부산시와 후쿠오카시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는 한일 우호의 안내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사 영토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해협을 넘은 두 도시마저 시민 교류를 중단시켜 초등생들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 정이 돈독해 지기를 바란다. 다극화시대에서 한 나라라면 안 되는 일이라도, 한일 양국이 협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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