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35
Ⅲ. 궁궐 식재 현황
현황분석
1. 경복궁
2. 창덕궁
3. 창경궁
4.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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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37
현황 분석
1. 경복궁
1) 개요
(1) 연혁1)
① 태조대(太祖代: 1392~1400)의 창건 당시
1392년 7월 17일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
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한 이듬해 3월 국호를 ‘조선(朝
鮮)’으로 정하고, 도읍의 천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태조2년(1393) 2월에 도읍 창건 역사에 참여하게 된 권중화
등이 <신도종묘사직궁전조시형세지도(新都宗廟社稷宮殿朝市形
勢地圖)2)>를 왕에게 바쳤다.
그 후 태조3년(1394) 8월 태조가 친히 한양을 답사하여 천
도의 터를 결정하였다. 그 후 9월 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
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조영조직(造營組織)을 설치하고, 궁궐
조성의 임무를 심덕부(沈德符), 김주(金湊), 남은(南誾), 이
괄(李适), 이직(李稷) 등에게 맡기었고, 이들을 한양으로 보
내어 궁궐, 종묘(宗廟), 사직(社稷), 시전(市典), 도로의 위
치를 정하게 하였다. 동년 9월 9일 권중화 등이 궁궐과 종묘
의 설계도서를 작성하여 개경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10월 25일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
양부 객사를 이궁으로 삼아 정무를 집행하였다. 동년 11월 3
일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영선공작(營繕工作)의 일
을 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궁궐의 조영은 12월 1일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
事)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궁궐터에 개기제(開基祭)를 거행
토록 하고, 12월 3일 판삼사사(判三司使) 정도전(鄭道傳), 참
찬문하부사(參贊門下副使) 김입견(金立堅)으로 하여금 종묘와
궁궐의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 드리
게 하고, 12월 4일 개토(開土)를 시작으로 여러 산사(山寺)의
1)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2007”, “정재훈, 한국전통의 원, 조경,
1996”, “문화재청, 경복궁 태원전권역, 2005”, “이덕수, 신궁궐기행, 대
원사, 2004”을 참고하였음.
2) 새로운 도읍에 종묘, 사직, 궁전, 중앙관부, 시장 등을 배치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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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들을 모아 공역을 시작한 것부터이다.
경복궁은 이듬해인 태조4년(1395) 9월에 완성되었다. 마무
리 단계에서는 경기·충청 지역 백성들의 부역 노동에 힘입어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의 경복궁 평면배치는 『조선왕조실록』「태조실
록(太祖實錄)」태조4년(1395)년 9월 29일 기사에 건물 배치
및 기능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다. 즉, 연침(燕寢)·
동소침(東小寢)·서소침(西小寢)·보평청(報平廳;便殿) 등 내
전의 기능을 하는 건물과, 정전(正殿)·동서각루·동서누고
(東西樓庫) 등이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문은 정전 남
행랑에 전문(殿門)을 두고, 그 남쪽에 오문(午門)을 배치하였
으며, 오문 양쪽에 훗날 세종 때 월화문(月華門)과 일화문(日
華門)이라 명명된 동서 편문을 배치하여 놓았다.
이상의 궁궐의 핵심 부분인 정전·편전·침전 이외의 궐내
(闕內) 시설은 주방(廚房)·등촉인자방(燈燭引者房)3)·상의
원(尙衣院)4)·양전사옹방(兩殿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
지방(承旨房)5)·내시다방(內侍茶房) 등 궁중 생활을 보좌할
최소한의 시설과 경흥부(敬興府)6)·중추원(中樞院)7)·삼군
부(三軍府)8) 등 중요 관청이 나열되어 있었다.
위와 같은 구성으로 경복궁의 창건 당시 규모는 도합 390여
칸이었다.
창건된 신궁의 건물에 대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정도(定都)
와 궁전 완공을 축하하기 위한 궁궐 연회 때였다. 궁궐 완공
한 달 뒤인 1395년 10월 태조가 백관(百官)을 모아 궁궐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여기에서 정도전(鄭道傳)이 궁호(宮號)
를 지어 올렸다. 『詩經』「周雅」편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
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9)’에서 ‘景福’의 두 글자를 취
하였는데 길이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새 왕조의 번
영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정도전은 정전(正殿)을 근정전
3) 燈燭引者房 : 궁궐 내의 燈燭(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곳.
4) 尙衣院 : 御衣帶 진공, 재물·보물관리.
5) 承旨房 : 王命出納을 담당하던 관청.
6) 敬興府 : 中宮의 僚屬을 관장하던 곳.
7) 中樞院 : 조선 전기 왕명의 출납, 兵器· 軍政, 宿衛(숙직)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
8) 三軍府 : 王權과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을 지휘·감독하는 최고 軍府.
9) 문장의 뜻을 풀이하면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39
(勤政), 동루를 융문(隆文), 서루를 융무(隆武)라 하고, 보평
청(報平廳;便殿)을 사정(思政)이라 하였고, 연침(燕寢)을 강
령(康寧), 동소침을 연생(延生), 서소침을 경성(慶成)이라 하
였다.
창건 초기의 경복궁 추정 배치를 살펴보면 궁궐의 남북 중
심축선상에 정문·영제교·근정문·사정전·강녕전 등이 앞뒤
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세 개의 중심적인
공간의 핵심이었는데 이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삼문삼조(三門三朝)’라는 조항과 관련지을 수 있다.
『주례』는 중국 고대 예제의 근본 되는 경전 중 하나로 그
영향력은 중국은 물론 조선에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례는 기원전 12세기경에 존재했던 주나라의 예의 제
도를 적은 글이라고 하지만 그 편찬은 한대(漢代)인 기원전
300년경에 흩어져 있던 여러 책을 모아 이루어진 것이다. 모
두 6권으로 ‘천관(天官)’은 통치일반, ‘지관(地官)’은 교
육, ‘춘관(春官)’은 사회·종교제도, ‘추관(秋官)’은 법
무, ‘하관(夏官)’은 군사, 그리고 마지막의 ‘동관(冬官)’
은 인구·영토·농업을 다루었는데 동관은 ‘고공기(考工
記)’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10).
『주례』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궁궐제도를 정의하려는 노력
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여러 대에 걸쳐 방대한 논의를 낳
았고, 주례 이외에도 『예기』,『서경』,『시경』등이 참고·
인용되었다. 특히 『예기』나 『시경』등에 나오는 여러 문
이름이 차용되어 『주례』의 삼조에 세 개 또는 다섯 개의 문
이 첨가되어 ‘오문삼조(五門三朝)’ 또는 ‘삼문삼조’의 궁
궐제도 설이 만들어졌다11).
한(漢)·당(唐)의 예학 전문가 사이에서는 周代 朝와 門의
배치에 대해서 천자의 도성(都城)은 오문(五門)이 있고, 제후
는 삼문(三門)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 해석은 후한의 학자
정중(鄭衆)에서 시작되어 정현(鄭玄)에 와서 정돈되었다. 정
중은 『주례』「추관」의 ‘朝士掌建邦外朝之法’에 대한 주
석을 달면서, 5문을 설명하면서 “外曰皐門, 二曰雉門, 三曰
庫門, 四曰應門, 五曰路門, 路門一曰畢門”이라고 풀이를 내
10) 김동욱, 경복궁 건물배치의 ‘삼문삼조’설에 대한 의문, 건축역사연구
10(1), pp.85~87. 2001.
11) 김동욱, 전게서,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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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이에 대해 정현은 『예기』의 명당위(明堂位) 편을 근
거로 제후국인 노(魯)나라에서는 고문(庫門)이 천자의 고문
(皐門)에 해당하고, 치문(雉門)은 천자의 응문(應門)에 해당
한다고 하여 제후의 삼문을 제시하였다. 당대에도 대체로 천
자(天子) 5문, 제후 3문이라는 기본 구성은 수용하는 경향이
었다12).
송대에 들어와서는 시경·춘추·상서·예기를 바탕으로 천
자도 제후와 마찬가지로 3문을 둔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
었다. 문(門)과 조(朝)의 학설은 이후에도 주자(朱子)를 비롯
한 역대 학학자들의 설이 제시되다가 청대에 와서 대진(戴震)
이 천자와 제후가 모두 삼문삼조라는 해석을 제시하여 어느
정도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진은 문과 안팍의 조(朝)라
는 광장13)과의 상관관계에서 문의 수와 조의 수는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리를 발견하고 주(周)의 천자는 안에서부
터 연조(재조), 치조, 외조의 삼조를 두고, 각각 노문(路門),
치문(雉門), 고문(庫門)을 둔다고 주장한 것이다14).
역대 경학자들에게 있어서 ‘삼문삼조’의 문제는 이것을
실제의 궁궐에 어떻게 적용시켰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기보다
는 『주례』를 비롯한 고대 경전에서 궁궐제도는 어떤 원칙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삼문삼조’라
는 개념을 실제 궁궐에 적용시키더라도 꼭 맞아 떨어지는 것
은 아니며, 각 시대마다 다른 궁궐 배치를 갖고 있는 것도 사
실이다. 특히 삼조의 위치만을 비정한다면 어느 정도 맞아 떨
어지지만 삼조에 삼문까지 연관 짓게 되면 경전 본래의 의미
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경복궁은 우리나라 궁궐 가운데 비교적 배치 개념이 명쾌하
고 가장 질서가 잡힌 구성을 한 궁궐이다. 특히 강녕전을 중
12) 김동욱, 전게서, p.87
13) 『주례고공기』에 기술되어 있는 조(朝)라는 개념은 어떤 공간이나 영
역을 가리키기보다는 거행되는 의식 자체를 가리키거나 의식이 거행되
는 빈 광장을 지칭한다고 이해된다. 각 조에는 일정한 명칭을 가진 출입
문이 마련된다. 즉, 궁궐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연조는 왕이 거처하는 노
침의 광장에서 거행되는 의식이고, 치조는 노침의 출입문인 노문 밖의
광장에서 거행되는 의식이고, 치조의 출입문인 응문 밖 광장에서는 외조
의 의식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내조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 사이에 치
조와 연조를 합친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단지 연조를 지칭하는 것
으로 보기도 한다(김동욱, 전게서, p.85).
14) 김동욱, 전게서. p.8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41
심으로 한 내전 구역과 근정전과 사정전이 있는 외전 영역은
건물이 앞뒤로 위치하고, 두 건물은 담장과 문으로 구분되어
있다15).
그러나 외조는 그렇게 간단하게 비정되지 않는 문제가 있
다. 경복궁의 삼문삼조설을 말하는 여러 문헌에서는 공통적으
로 경복궁 근정문에서부터 광화문까지의 공간을 외조로 정의
하고 있다. 외조에는 삼군부(三軍府)와 중추부(中樞府), 상서
사(尙書司) 등 궐내에 들어와 있는 관아들이 위치한다. 그러
나 『주례』를 비롯한 고대 경전에서 말하는 외조는 치문 바
깥쪽 좌우의 양궐에 나라 정책을 게시하여 백성들이 보고 알
도록 하며, 필요할 때는 이곳에 백성들을 모아 왕이 직접 국
가적인 결정을 하는 장소로 삼았다. 또 외조 좌우에는 종묘나
사직이 세워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고대 경전의 외조 개
념으로 본다면 경복궁에서 근정문과 광화문 사이를 외조로 보
는 것은 맞지 않는다16).
그러나 경복궁의 ‘삼문삼조’의 원리에 따라 계획되었다는
견해는 일본인 요네야마 신죠[米山信三]가 최초 제기한 후 그
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주장으로 이어져 왔다17).
이 견해에 따르면 광화문은 고문(庫門), 근정문은 치문(雉
門), 고종시대에 재건된 향오문(嚮五門)은 노문(路門)이 되
며, 따라서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외조, 근정문에서 향오문
까지 치조이며, 연조는 향오문 뒷공간인 강녕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이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경복궁에 대하여 삼문삼조의 영역구분이 가능하다는
의견과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실제적으로도
삼문삼조의 공간 구분은 특히 궁궐 주요 전각의 배치가 축선
상에 위치할 때 그 의미가 확실해 지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궁
궐에 있어서는 특히 창덕궁이나 창경궁과 같이 지형지세를 우
선시한 배치에서는 그 의미는 희미해진다. 또한 『주례』가
이상적 규범으로서 중국 역대의 궁궐을 만들 때도 늘 참고가
되긴 했으나, 중국의 각 시대 왕조와 왕권의 실제에 따라 궁
궐의 모습은 달라졌고, 조선시대 초기의 경복궁도 왕권과 관
15) 김동욱, 전게서, p.88
16) 정룡, 韓中 궁궐의 입지 및 삼조공간 구성에 관한 비교 연구, 전북대박
사논문, 2006
17)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3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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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 기구에 맞추어 설계되었을 것이 틀림없다18).
어떠한 공간에 있어서도 그 세부적인 구분은 공간의 용도와
기능에 따라 구분되어 지고, 건립될 때부터 공간 기능을 상정
(想定)해서 계획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들을 생각하면, 경복
궁의 공간 영역을 삼문삼조의 형식에 따라 외조, 치조, 연조
공간으로의 구분이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되어 진다.
창건 초기의 경복궁은 궁궐의 규모가 390여 칸으로 조선
후기 궁궐에 비해 매우 규모가 작고, 연조에 3동(棟)의 침전
밖에 없었고, 궁성 안의 관청으로 상의원(尙衣院), 사옹방(司
饔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
房), 군사 기능을 담당한 중추원(中樞院), 중앙군 소속의 무
반을 통솔하던 삼군부(三軍府)19) 등의 최소한의 부서만 설치
되었던 것으로 보아 초기관료 유신(儒臣)들이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적합하게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20).
초기 경복궁 내에도 소규모의 후원(後苑)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4년(1404) 9월
29일 조에는 후원에 연못을 팠다는 기사가 보이고, 『궁궐지
(宮闕志)』 「경복궁 청량정 조(條)」에는 청량정(淸凉亭) 이
라는 정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창건 당시 경복궁은 제반 시설이 고루 갖추어진 완
성된 궁궐은 아니었다. 개경 천도와 한양 환도(還都)를 거듭
하면서 10여 년 동안 경복궁은 버려지게 되었고, 태종4년
(1404)에는 급기야 환도 준비로 이궁(離宮)인 창덕궁이 창건
되면서 당분간 경복궁을 대신하게 되었다.
초기 경복궁의 배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옛날 도면은 약
14종이 있다21). 선행 연구를 통해 각 도면의 비교를 통해 추
정하면 표Ⅲ-1과 같다. 대체로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
을 문헌을 통해 추정하여 그린 도면과 『북궐도형(北闕圖
形)』 이후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하거나 또는 새로 실측하여
그린 실측도면으로 나뉜다.
18)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36, 2007
19) 三軍府 : 軍令과 軍政을 총괄하던 군사기구
20) 문화재청, 전게서, p.36. 2007
21)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47, 200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43
도 면 명 소장 또는 수록처 추정 제작 년대 추정 공간 구성 년대
① 景福宮圖소더비 경매 출품 도면 1767~1772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모습을 후
대에 추정한 도면
② 景福宮全圖삼성출판박물관 1767~1772
③ 景福宮古圖서울대중앙도서관 영조(18세기) 이후
④ 景福宮全圖강릉시립박물관 영조(18세기) 이후
⑤ 景福宮圖국립중앙도서관 영조(18세기) 이후
⑥ 景福宮地圖국립중앙도서관 186622)
⑦ 景福宮圖서울역사박물관 1866 경복궁 重建 중의 도면
⑧ 北闕圖形(北闕後苑圖
形포함)
규장각
국립문화재연구소 1901~190723)
⑨ 景福宮平面圖서울대중앙도서관 1907년 이후24) 고종조 2차 중건 이후의 도면
⑩ 景福宮平面圖(1)25) 藏書閣1907년 이후26)
⑪ 景福宮配置圖朝鮮古蹟圖譜 十卷1915년 이후27) 1915년 공진회를 위해 전각을 철
⑫ 景福宮平面圖(2) 藏書閣1915년 이후28) 훼한 도면
⑬ 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
共進會場平面圖
『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
共進會報告書』1915년 1915년 공진회 당시의 도면
⑭ 景福宮平面圖국가기록원 1920년대 초반29) 총독부청사가 들어서기 직전의 도
면
표Ⅲ-1. 경복궁 관련 도면의 현황과 추정 제작 년대(1926년 총독부 청사 건립이전)
22)景福宮地圖(국립중앙도서관소장)는 양심당(養心堂)의 위치와 다른 전각
에 연결되는 방식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景福宮圖』와 동일하다(문
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48).
23)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 계획보고서, p.105,
2002(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48에서 재인용).
24)景福宮平面圖(서울대중앙도서관소장)는 北闕圖形을 경복궁평면도로 재작
성한 것으로 판단된다(문화재청, 전게서, p.48에서 재인용)
25)藏書閣 소장본 景福宮平面圖는 같은 제목으로 두 장의 지도가 있어 편
의상 (1)과 (2)로 구분하였다(문화재청, 전게서, p.48에서 재인용).
26)藏書閣 소장본 景福宮平面圖(1)은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 景福宮平面圖
와 동일한 도면이다(문화재청, 전게서, p.48에서 재인용).
27)朝鮮古蹟圖譜(10권)의 景福宮平面圖는 北闕圖形을 간략화해서 그린 배
치도 바탕에 현존하는 전각들을 진하게 표시한 도면이다. 1915년 공진
회가 열리기 직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전게서, p.48에서 재
인용).
28)藏書閣 소장본 景福宮平面圖(2)는 조선고적도보(10권)의 景福宮配置圖와
같은 시기로 추정되나 北闕圖形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정확한 측량에
의해 그린 도면으로 판단된다(문화재청, 전게서, p.48에서 재인용).
29)국가기록원 소장 景福宮平面圖는 도면 위에 총독부청사의 외곽선이 겹
쳐져 있어 총독부청사가 준공된 1926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 전게서, p.4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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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Ⅲ-6. 표Ⅲ-6의 ①도면. 1997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면서 알려지게
된 경복궁 도면. 이 그림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기 전의 모습을 영조 때
세운 親蠶碑와 採桑臺를 첨가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영조 연간(1724~1776)에 제
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 전각들의 규모나 형태는 정확하지 않지만, 각 전각들의
위치나 공간 구성은 매우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인용:이덕
수, 신궁궐기행, p.32, 대원사, 2004)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45
그림Ⅲ-7.『景福宮全圖』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의 경복궁 원형을 도식화한 그림.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도면 맨
아래 부분 광화문부터 각 건물 기능에 대한 설명을 붙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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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궐내각사
① 都摠府 : 군무(軍務)와 군정(軍政)을 담당하던 관청
② 典設司 : 조선시대에 의식에 쓰이는 장막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
한 관청
③ 典涓司 : 조선시대 궁궐의 수리·청소를 맡아본 관청. 1394년(태
조 3)에 설치한 경복궁제거사(景福宮提擧司)를 1466년(세조
12) 전연사로 고쳐 공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하였다.조선 중
기 이후, 토목·영선(營繕)을 맡아보던 선공감(繕工監)에 병합되
었다.
④ 承文院 : 조선시대에 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
⑤ 校書館 : 교서감(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태조1
년(1392)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경적(經籍)의 인쇄와 교정·
향축(香祝: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인전(印篆) 등을 맡아 보던
관청. 태종대에 그 이름을 교서관으로 고쳤다가 정조5년(1782)
에 규장각(奎章閣)과 함께 통합시켜 규장각을 내각(內閣), 교서
관을 외각(外閣)으로 불렀다.
⑥ 司饔院 : 궁궐의 수라상에 쓰이는 그릇을 관장하던 관청.
⑦ 承政院 :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
과 함께 조선의 중추적인 정치기구이며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
아 보던 관청.
⑧ 弘文館 :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
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⑨ 藝文館 : 고려시대에는 제찬(制撰:임금의 말씀이나 명령의
내용을 신하가 대신 짓던 일. 代撰)과 사명(詞命: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칙령
(勅令)과 교명(敎命)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며, 개국
초 고려의 관제에 따라 예문춘추관으로 합쳐졌던 것을 태
종1년( 1401년)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개편하였
다.
⑩ 欽敬閣 : 물이 흘러 자동으로 움직이는 천문 시계 옥루(玉漏)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천체 운행을 관측하던 곳.
⑪ 內醫院 : 삼의원(三醫院)의 하나. 조선 시대에 궁중의 의약(醫
藥)을 맡아보던 관아를 가리킨다. ≒내국(內局)·봉의(奉醫)·상약
(尙藥)·상의(尙醫)·약방(藥房)·약원(藥院)·장의(掌醫)·태의원.
⑫ 尙瑞院 : 새보(璽寶:옥새와 옥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부패(符
牌)·절월(節鉞)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부패는 패부(牌符)라고
도 하며, 한국·중국 등에서 옛날에 통용된 각종 증명의 총칭이
다. 부(符)는 할부(割符), 즉 2개를 짝맞춤으로써 증명을 하는
것이고, 패(牌)는 요즘의 메달이다. 출진(出陣)·무역·역전(驛傳)·
성문 출입 등의 경우 증명으로 삼는 것이며, 재료는 금·은·동·나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47
무·대나무·비단·종이 등이 상용되었다. 옛날부터 여러 종류의 부
패가 있었는데, 지방 출장관원에게 교부한 마패(馬牌), 금군(禁
軍)이 성문출입 때 소지한 부험(符驗), 군대 동원의 표지로 쓴
발병부(發兵符), 순장(巡將)이 순찰 때 쓴 순패(巡牌), 그 밖에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가 찬 호패(號牌)도 부패에 속한
다. 절월(節鉞)은 조선시대 임금이 지방관에게 하사한 절(節)과
부월(斧鉞). 새로 임명된 관찰사·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
使)·대장(大將)·통제사(統制使) 등의 지방관이 부임할 때 내려주
었다. 행차 때는 의장용(儀仗用)으로 절부월을 앞장세워 위의(威
儀)를 과시하였다. 절은 손에 드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의 신표
로 중요한 임무수행자의 증명이었다. 부월은 긴 자루가 달린 나
무 도끼로 은빛 또는 금빛을 칠한 것도 있었으며, 정벌(征伐)·형
륙(刑戮)·중형(重刑)의 뜻으로 군령(軍令)을 위반한 자에 대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하였다.
⑬ 春秋館 : 고려시대에 시정(時政)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 고려
개국 초에는 사관(史館)이라 하다가 충렬왕34년(1308) 이를 문
한서(文翰署)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으로 고쳤고,
충숙왕12년(1325)에 예문관에서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하였다.
⑭ 觀象監 : 조선시대 천문·지리학(地理學)·역수(曆數:책력)·측후(測
候)·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역수 즉 책력은 1년
의 시령과 그 날짜를 기록한 문서를 말하며, 흔히 달력이라고도
한다. 시령은 흔히 절기라고도 부르며, 세시와 요일, 일식, 행사
일 등을 이른다.
⑮ 內班院 : 內侍府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 내시를 관할하던 관
아. 실무를 담당한 것은 환관들이다.
⑯ 報漏閣 :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인 자격루를 설치했던 전각
⑰ 尙衣院 : 조선 시대에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
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상방(尙方)·장복(掌服).
⑱ 司僕寺 : 고려·조선 시대 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
장한 관청.
⑲ 簡儀臺 : 천후관측소
⑳ 日星儀 : 日星定時儀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태양과별을 이
용하여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하던 기구.
採桑臺 : 친잠제(親蠶祭) 순서의 하나인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장소. 친잠제는 특별히 마련된 제단에서 작헌례(酌
獻禮)를 행하고, 채상단(採桑壇)에서 의례에 맞춰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인 다음, 전각에서 세손과 백관으로부터 진
하를 받고 음식을 베푼 후, 국왕을 만나 조견례를 행하는
의례들을 통틀어 말한다.
親蠶碑 : 왕비가 모범을 보이는 뜻에서 직접 누에를 치던 의식을
48
기념하는 비. 직물을 짜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었으므로
국왕이 행하는 친경(親耕)과 짝하여 왕비가 시행하였다.
● 동궁(東宮)
① 春坊 : 세자시강원. 조선 전기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
아.
資善堂 : 동궁의 書筵을 행하는 곳.
丕顯閤 : 세자의 서연장인 자선당의 부속건물
● 眞殿과 魂殿
- 문소전(文昭殿) : 태조와 태종의 위패를 모셨다.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49
② 태종대(太宗代 : 1400~1418)의 법궁 체재 보완
경복궁의 조경시설에 대한 기록들은 태종대 이후 부터 간간
히 궁내를 수리한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종11년에는 이
른바 명당수(明堂水)를 금천으로 끌여들였고, 12년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할 장소로 작은 누각을 헐고 그 서쪽에 큰 누각인
경회루(慶會樓)를 세웠고, 누각 둘레에 넓은 못을 파서 아름
다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성종실록」 성종5년 12월 17일 기사를
보면 성종 대에 경회루를 중수하면서 새로 만든 돌기둥에 새
긴 반룡(蟠龍) 조각은 외국 사신의 눈에 들어 조선에서 가장
장절(壯絶)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고 적혀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조
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별집
(別集)」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성종 정유년(1477)에 유구
국(琉球國)30) 사신이 말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이 첫 번째
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온 것이 두 번째요, 예빈시(禮賓寺)31) 정(正)이 잔치할
때마다 아주 큰 잔에 술을 시원하게 마시되 조금도 어려워하
는 기색이 없는 것이 세 번째이다’고 하였다. 이 때 이숙문
(李叔文)이 예빈시 부정(副正)이었는데 친구들이 이 말을 듣
고 포복절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32).
태종은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는데 반하여 세종은
즉위 후 3년 되던 해 경복궁에 이어하여 경복궁을 수리하였
다. 이 때 정해진 문의 이름은 광화문(光化門), 일화문(日華
門), 월화문(月華門), 건춘문(建春門), 영추문(迎秋門) 등이
며, 금천에 걸쳐진 다리의 이름을 영제교(永濟橋)라 하였고,
정문의 이름도 오문(午門)에서 홍례문(弘禮門)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경복궁에 성문이 세워지고 이름이 정해진 것은 창건된
후 30여 년이 지난 뒤였다.
③ 세종대(世宗代: 1418~1450)의 법궁 완비
세종대에 들어와서야 경복궁은 궁성에 궐문이 갖추어진 명
30) 유구국(琉球國) : 일본 오끼나와[沖縄]를 가리킴.
31) 예빈시(禮賓寺) : 고려 ·조선시대 빈객(賓客)의 연향(宴享)과 재신(宰臣)의 음식
공궤(供饋)를 관장한 관청.
32)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36~37, 2007
50
실상부한 궁궐이 되었다. 세종9년(1427)부터는 궐내 제반 시
설을 수리하거나 신설해 나가면서 점차 법궁 체재를 완비하였
다.
세종 8년에는 근정전을 수리하였고, 9년(1427)에 동궁(東
宮)을 창건하였다. 15년에는 궁성에 4대문이 있어야 한다는
상소를 받아들여 궁궐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설치하여
궁성 4문의 체제를 완성하였다. 세종16년 홍례문 밖에 있는
동서랑에 의정부 육조 및 각사가 입직(入直)하고 대조(待朝)
하는 곳으로 삼았다. 동년 8월에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17년 9월에는 주자소(鑄字所)33)를 궁궐 안에 설치하였다. 20
년에는 강녕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세움으로서 당시 과
학문명의 첨단적 시설을 모두 궐안에 갖추게 되었다. 또한 25
년에는 언문청(諺文廳)34)을 설치하여 우리글을 완성시키는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역대 제왕의 궁중 내 제사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진전(眞
殿)35)과 혼전(魂殿)36)을 지었다. 세종14년 11월 광효전(廣孝
殿)과 문소전(文昭殿)을 합사(合祀)하기 위해 새 건물을 지었
고37), 세종20년 3월 29일에 선원전(璿源殿)38)을 문소전(文昭
殿) 동북쪽에 옮겨지었다.
또 연조 영역을 넓히기 위해 세종22년에는 교태전(交泰殿)
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에 완공하였다. 동년 4월 상서사(尙
33)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담당하던 관청. 조선시대 인쇄 업무를 담당하
기 위해 1403년(태종 3) 설치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소속시키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직(李稷), 총제(摠制) 민무질(閔無疾), 지신사(知
申事) 박석명(朴錫命), 우대언(右大言) 이응(李膺) 등으로 하여금 활자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이다.
서울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던 관청을 1435년(세종 17) 경복궁 안으
로 옮겼으며, 1460년(세조 6)에는 교서관(校書館)으로 소속을 옮기고,
전교서(典校署)라 개칭하였다.
34) 조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궁내에 설치한 기관. 《세종실록》에 '
언문청'이 처음 언급되고, 《문종실록》에 '정음청'이라는 기관이 나타난
다. 《문종실록》에 정음청은 전부터 있어 온 것이라 하여 세종 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한재집》에 수록된 신숙주의 행장에 의
하면 정음청을 만들고 언문관계 서적을 편찬하도록 한 기록으로 보아
정음청과 언문청은 같은 기관으로 파악된다. 신하들의 요구에 따라 단
종 즉위 후 폐지되었다. 《중종실록》에는 중종이 언문청을 혁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연산군이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35) 진전(眞殿) : 임금의 화상(畵像)이나 사진인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
36) 혼전(魂殿) : 조선 시대에,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37) 東國輿地備考 제1권, 경도편 원유조(苑囿條)
38)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영정을 봉안한 진전(眞殿)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51
書司)와 춘추관(春秋館)을 궐 안에 새로 지었고, 5월에는 의
정부와 예조에서 올린 여러 문의 이름을 새로이 명명하여 보
루문(報樓門:월화문밖), 영의문(迎義門:영추문 안), 동명문
(東明門:東直房의 문), 西明門(西直房의 문) 등이었다39).
세조 말년인 31년(1449) 6월에는 경복궁 안에 강녕전(康寧
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만춘
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 등이 갖추어졌다. 또한 연조의
소실(小室)로는 함원전(含元殿)40)·교태전(交泰殿)·자미당
(紫薇堂)·인지당(麟趾堂)·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
堂)·청연루(淸讌樓)41) 등이 건립되었다.
위에서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편전인 사정전
의 좌우에 배치되어 사정전(思政殿)을 보좌하는 소편전(小便
殿)으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렇게 되어 사정전이 강녕전에
가까이 배치되어 소침전인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
의 보좌를 받던 방식에서 벗어나 편전 구역이 분명하게 나눠
지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보여 줄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
지만 영조 때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면(표Ⅲ-1의 ①~⑤까지의
그림) 세종 대에 마련된 법궁의 배치를 대체로 짐작할 수 있
다.
④ 세조대(世祖代 : 1455~1468)의 법궁의 발전
세조대에는 경복궁 내에 수리도감을 설치하여 궁내를 수리
하였고, 예종 때에는 숙직 군사를 위해 선공감(繕工監)42)에
서 영추문 안에 가가(假家)43)를 지었고, 성종 때에는 제조와
낭청(郞廳)44) 따로 임명하여 근정전을 새로 칠하고 경회루를
39)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38, 2007
40) 함원전(含元殿):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부속건물.
41) 명종실록, 명종12년 5월 11일 조 “청연루는 3殿(대왕대비·왕대비·왕)이
合御하는 곳인데 지세(地勢)가 좁다고 하였으며, 이때 눈비를 피하기 위
해 월랑(月廊)을 조성토록 승정원(承政院)에 교서를 내렸다.”
42) 선공감(繕工監) : 조선시대 토목·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
43) 가가(假家) : 임시 거처
44) 낭청(郎廳) : 조선시대 후기 비변사·선혜청·준천사·오군영 등에 두었던
실무관직. 본래 낭관(郎官)과 같은 의미로 각 관서의 당하관을 가리켰으
나 1555년(명종 10)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바뀌어 12명의 낭청을 두면
서부터 하나의 관직으로 자리잡아 뒤에 설치된 선혜청·오군영 등에도 차
례로 낭청직이 설치되었다. 선혜청 낭청은 인조4년(1626) 통합·정비되어
각 도의 대동미·대동포의 관리, 상평·진휼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1760년
준천사의 낭청에는 정7품관 3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성부 참군
(參軍)을 겸하였다. 오군영의 낭청은 모두 종6품으로 정조 때 이후로 종
사관(從事官)이라고 불렸다.
52
중수하였다. 중종22년(1527)에는 경회루 일곽을 수리하고 비
현합(丕顯閤)45)을 증건(增建)하였으며, 23년 9월에는 자전
(慈殿)을 수리하면서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이렇게 법궁의 면모를 유지해 간 경복궁은 명종대의 큰 화
재를 만나기 전까지 조선 전기의 궁정문화의 보고(寶庫)로서
크게 발전하였다46).
후원은 정종 때 상림원(上林苑)이라 불렸으며, 새와 꽃을
길렀으나 세종이 그것들을 모두 민간에 나누어 주었다고 하
며, 세종 이후에는 서현정(序賢亭)·취로정(翠露亭)47)·관저
전(關雎殿)·충순당(忠順堂)48) 등을 지어 후원으로 가꾼 것
것으로 판단된다49).
궐내 관서는 승정원(承政院)·홍문관·상서원(尙瑞院)·춘
추관(春秋館)·예문관(藝文館)·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
館)·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
사(司僕寺)·사도사(司導寺)·관상감(觀象監)·세자시강원(世
子侍講院)·전설사(典設司)·전연사(典涓司)50)·내반원(內班
院)·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등이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직전
까지 경복궁 안에 있었다.
명종 8년(1553) 9월 14일에 일어난 불로 근정전만을 남긴
45) 세조실록 세조9년 11월 8일 조(條), “편전인 사정전의 동쪽 모퉁이에
있는 내상고(內廂庫)* 2칸에 창문을 그대로 두고 임금이 거주하는 곳으
로 삼고 비현합(丕顯閤)이라 명명하였는데 그 이름은 『서경(書經)』의
‘昩爽丕顯’(여명을 환하게 밝힘)에서 취하였다.
*내상고(內廂庫) : 궁궐 내에 있는 내금위 소속의 창고. 내상고는 내금위
(內禁衛)의 무기고(武器庫)로서 이곳에 각종의 무기들이 소장되어 있었
다. 상(廂)은 본래 정방(正房)의 좌우에 붙어 있던 방옥(房屋)을 지칭하
였는데, 중국 당•송대에 임금의 금군으로서 좌우상(左右廂)과 사상(四廂)
등의 제도가 있었음. 이에 따라 상(廂)은 호위부대의 의미로도 사용되었
던 바, 내상(內廂)은 조선 시대 금군 중의 내금위(內禁衛)를 지칭하는 용
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내금위(內禁衛) : 조선 시대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부대의 하나. 정원은
1백 90명으로 소수였으나, 양반 출신 자제 가운데서 시험을 통해 뽑은
정병(精兵)으로 이루어졌음.
46)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는 이 시기의 경복궁 내에 있었던 여러 전각들과 시설들이 상세하게 기
록되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세종 때 법궁 체재를 완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47) 세조2년 1월 2일 준공
48) 후원 건물 가운데 충순당은 명종 때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섭정 장
소로 활용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49)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39, 2007
50) 전연사(典涓司) : 조선시대 궁궐의 수리·청소를 맡아본 관청. 조선 중기
이후, 토목·영선(營繕)을 맡아보던 선공감(繕工監)에 병합되었다.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53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삼
전(三殿)이 모두 창덕궁으로 옮긴 후 명종 9년 봄에 중건 공
사가 시작되어 9월 18일에 낙성되었다. 이 때 중건된 전각은
전(殿)이 다섯으로 강녕전, 사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이고, 당(堂)이 둘로 양심당(養心堂), 자미당(紫薇堂), 각
(閣)이 하나로 흠경각(欽敬閣), 합(閤)이 하나로 비현합(丕顯
閤), 그 외 문랑청방(門廊廳房) 등 모두 합쳐서 370여 칸이었
다.
이때의 일을 기념하는 글을 퇴계 이황에게 맡겼는데 그는
『경복궁중신기(景福宮重新記)』·『사정전상량문』·『자선
당상량문』 등을 지었고, 각 건물의 현액과 편전 내부에 장치
할 대보잠(大寶箴)51)·칠월편(七月篇)52)·억계(抑戒)53) 등을
쓰기도 하였다.
중건된 경복궁은 약 40년 뒤인 1592년 4월 선조 대의 임진
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궁터는 완전히 폐허로 변하였고,
그 후 270년간 복구되지 못하였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 중건 계획을 구체적인 단계까지 입안하였다. 「선조실
록」에 실린 여러 기사에 의하면 당시의 역사 편찬 기관인 춘
추관에서 중건에 필요한 자료 즉, 창건 당시의 자료와 성종
때의 수리 기록인 「경복궁조성의궤(景福宮造成儀軌)54)」 및
명종 때의 중건 기록 등을 한 데 묶어 등서(謄書)로 만들어
왕과 주무 관청인 工曹에 바쳤다고 한다55).
51)대보잠(大寶箴) : 당나라 문신 장온고(張蘊古)가 천자(天子)를 위하여 지
은 글. 대보(大寶)는 천자의 자리를 말한다. 태종 즉위 초에 장온고는 중
서성(中書省) 관리였는데, 이 잠서(箴書)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쳐 천자의
자리가 막중한 것이며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규계
(規誡)하였다. 태종은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비단 300필을 하사하
고, 장온고를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임명하였다. 《당문수(唐文粹)》·
《고문진보(古文眞寶)》후집에 수록되었다. 한편 한국의 조선시대 학자
이황(李滉)에 의해 활자본으로 판각되기도 하였다.
52)빈풍(豳風) : ≪시경(詩經)≫ 국풍(國風)에 있는 편명(篇名).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두고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성왕(成王)
을 등극시킨 뒤,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지은
것임.
53)억계(抑戒) :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십(蕩之什)에 실려 있는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 위무공은 늙어서도 억계시 12장을 지어
항상 곁에서 외우게 함으로써 마음을 깨우치고 신하들로 하여금 늙었다
고 멀리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음.
54) 경복궁 궁궐 건축 공사에 관한 최초의 의궤인 듯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55) 이 등서(謄書)는 조선 전기 경복궁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나 임진왜란 때 궁궐과 함께 소실되었다.
54
이를 토대로 중건을 단행하려고 하였으나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므로 중건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준비하였던 재료들을 창덕궁을 중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
리하여 경복궁 중건은 27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재위기간 1608~1623년)은 창덕
궁·창경궁을 중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경궁(仁慶宮)과 경
덕궁(慶德宮)56)을 창건하는 대규모 공사를 말년까지 계속하
면서도 경복궁 중건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경복궁 터가 길하지 않다는 풍수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
문이다. 더군다나 경복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창덕궁·창경
궁·경희궁 등의 3궁궐이 동서(東西)로 벌려 있게 되어 경복
궁을 중건할 현실적인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도 한 몫을 하였
다.
이후 현종57)·숙종·영조58)·익종 등이 경복궁 중건의 뜻
을 밝혔으나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조선 말기 고종 초기에
이르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중건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
다.
⑤ 고종 2년(1865) 경복궁의 중건
드디어 경복궁 270여 년 간 법궁(法宮)으로서의 지위를 상
실한 채 버려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상고하기 어려운 지경이
었다.
56) 경희궁을 말한다.
57) 현종실록 현종8년 5월 임진(壬辰) 조(條), “현종은 경복궁 터에 효종비
인선왕후를 위하여 신궁(新宮)을 지으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
혀 뜻을 이르지 못하였다.”
58) 영조는 중건의사를 밝힌 적은 없으나, 경복궁 터에서 과거시험을 실시
하거나 즉위 40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영조의 비는 1767년 궁
궐 동북쪽의 채상대(採桑臺)에서 채상례(採桑禮)를 거행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丁亥親蠶碑」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1772년
에는 혼전인 문소전(文昭殿)의 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55
그림Ⅲ-8.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80여점의 서울
고경화(古景畵) 가운데 유일한 궁성도. 임진왜란으로 폐
허가 된 경복궁을 그린 것이다. 울창한 솔밭, 기둥만 서
있는 경회루, 축대만 남아있는 근정전, 잡초만 쌓인 광화
문의 돌기둥, 무너진 돌담장, 빈터를 지키고 있는 민가
몇 채 등이 쓸쓸함을 더해 주고 있다(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경복궁 내에 남아 있던 건물들의 목재는 다른 공사에 이용
되었으며, 심지어 경복궁 밖 민가가 경복궁으로 침범하는 일
도 있었다59). 경복궁의 중건 논의는 선조 때부터 꾸준히 제
기되었지만, 재력과 풍수상의 이유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복궁(1865) 4월 2일에 와서야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 ~ 1890)의 명으로 경복궁 중건이 시
작되었다. 4월 3일에 영건도감이 설치되고, 동월 13일을 시역
일(始役日)로 건의하였다. 시역일 전일 12일에는 고종이 직접
경복궁 터를 둘러보고, 경복궁 담장 밖에 있는 민가를 보상하
여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60).
59)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 43, 2007
60)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43, 2007
56
이후 경복궁 주요 전각 들은 경복궁 4월부터 고종 4년 12월
까지 대부분 영건된다. 공정을 살펴보면 대충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61) 제1단계에서는 궁궐의 담장과 문을 중건하였다.
270여 년간 비어 있던 궁궐이라 궁궐의 영역을 구획하고 출입
을 단속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와 함께 왕과 왕비의 침전도
동시에 공사가 이루어졌다. 교태전·강녕전·연생전·경성전
모두 궁성과 함께 6월 20일 제일 먼저 정초(定礎) 하였는데
외전보다 내전을 먼저 중건하여 궁궐에서 정치공간보다 생활
공간을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62). 동년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함원전(含元殿)·인지당(麟趾堂)·천추전(千秋
殿)·만춘전(萬春殿) 등 내전의 주변에 있는 전각을 중건하였
다.
내전을 중건한 후에 점차 바깥 지역으로 전각들을 중건하여
나갔는데 한꺼번에 많은 전각의 공사를 전각의 경중에 따라
선후를 정하여 공정을 정한 것으로 판단된다63). 고종3년 8월
25일에 근정전과 사정전 정초(定礎)를 시작으로 중건공사가
재개되고, 가장 규모가 큰 공사였다. 근정전과 사정전이 중건
되면서 궁궐의 담장과 사방의 문, 내전과 외전이 모두 갖추어
져 궁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홍례문(弘禮門)·근정문(勤政門)과 함께 경회루도 고종 3년
12월 8일에 중건이 결정되었지만, 외전 영역에 속한 홍례문과
근정문이 근정전과 사정전의 공정에 맞춰 먼저 공사가 진행되
었다. 경회루는 근정전과 사정전의 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인
고종 4년 2월 7일에 정초하여 4월 22일에 상량하였다.
경회루 상량 후 한 달 뒤에 궐내각사에 속한 수정전, 동궁
인 자선당의 공사를 시작하여 6월 말에 모두 상량하였다. 이
로써 경복궁 중건의 대부분이 마무리 되었고, 고종 4년 11월
15일과 12월 7일에 각각 선원전을 정초·상량하였다. 이렇게
주요한 전각들은 고종 4년 8월 8일 실록에서 경복궁의 영건이
완료되었기에 각종 행사를 치룬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
다64).
이러한 일련의 공정과정을 살펴보면 궁궐의 영역을 명확히
61) 문화재청, 전게서, p.44
62) 문화재청, 전게서, p.44
63) 문화재청, 전게서, p.44
64)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8월 8일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57
하는 궁장의 공사를 제일 우선시 하였고, 이와 함께 생활공간
인 내전의 공사를 외전 보다 먼저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내전 공사를 하면서 내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이 밖으
로 나가면서 공정을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중건 공사의 완료일은 고종4년 8월 8일 「고종실
록」에서 경복궁 영건 완료를 축하하는 각종 행사 기록이 나
오므로 이날을 완료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한 날은 고종5년 7월 2일이다. 그
러나 고종4년 8월 이전에 이어일(移御日)이 잡혀 있었다.
고종4년 8월 18일과 11월 8일에는 영건도감에서 각 전(殿)·
당(堂)·문(門)의 이름을 보고했고, 11월 16일에는 각 전각명
의 의미를 높이 칭송하고 대사령65)의 교서를 반포하였다.
고종은 고종5년 초에 경복궁으로 이어하기로 하였지만 실제
로는 6개월 정도 늦어진 고종5년 7월 2일 대왕대비·왕대비·
대비·왕비와 함께 이어하였다. 이어하고 나서도 중건 공사는
끝나지 않아 영건도감이 존속되었고 실제로 고종9년 9월 16일
에 공사의 회계부를 제출하고 해체되었다. 경복궁 4월 3일에
설치된 영건도감은 7년5개월여에 걸쳐 공사를 진행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중건 전후로 한 경복궁의 배치를 추정할 수 있는 도면은 약
14종이 있다(표Ⅲ-1. 참조). 이중에서 경복궁의 경복궁 중건
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도면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경
복궁지도(景福宮地圖)』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경복궁도
(景福宮圖)』이다. 이 중에서 경복궁의 중건 후의 모습을 보
여주는 도면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경복궁도(景福宮圖)』
로 추정할 수 있다66).
이 도면에는 좌측 하단에 주요 전각들의 정초일(定礎日)·
입주일(立柱日)·상량일 등의 시일이 적혀있는데 고종실록의
기사와 일치한다. 이 도면을 토대로 중건 당시의 경복궁 공간
구성을 살펴보면 내전과 외전이 교태전과 강녕전·경성전·연
생전·사정전·근정전 영역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이 영역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엄격한 질서 속에 배치되
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65) 대사령 : 대사면을 뜻한다. 사형의 죄를 제외한 사면을 시행한다는 내
용이었다(문화재청, 전게서, p.46)
66) 문화재청, 전게서, p.48
58
그림Ⅲ-9. 景福宮圖(서울역사박물관 소장)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59
그림Ⅲ-10. 『景福宮圖』(서울역사박물관소장)의 중심영역
의 배치 형태
고종 2년의 중건 이후 경복궁은 몇 차례의 화재로 재차 중
건을 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화재로 피해가 커지고 재정적 부
담이 커져 가자 고제(古制)를 바꾸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교태전 앞뒤로 행랑이 잇닿아 있고, 전각을 따라
길게 복도가 끊어지지 않게 연결되어 있어 화재 시 진압에 어
려움이 있으니 이를 고쳐 복도는 벽돌로 쌓고 지붕을 만들어
비를 피하게 하며, 전각의 초석도 높이 세우지 않게 하자고
하였다. 이에 고종 2년 중건 때 임진왜란 이전의 제도를 받아
들여 중심전각을 복도로 돌려 연결했던 것을 몇 차례의 화재
이후 고종 11년 이후에는 벽돌을 사용하고, 일부는 복도를 없
애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67).
고종 10년 12월의 화재로 교태전·자경전 등을 중건한 이
후68) 17개월 만에 다시 같은 지역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교
67) 문화재청, 전게서, p.53
68) 고종 13년 3월 27일에 시작하여 두 달여 간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60
태전·인지당·건순각·자미당·덕선당·자경전·협경당·복
안당·순회당·연생전·경성전·함원전·흠경각·홍월각·강
녕전 등 내전 전지역 830여 간이 모두 전소되었다. 고종 10년
의 화재의 피해가 400여 간이었으므로 그 피해는 두 배가 넘
는 것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5일 후 고종은 창덕궁과 창경궁
의 수리를 지시한다69). 이후 고종은 창덕궁과 창경궁이 수리
되어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까지 계속 경복궁에 머물렀다. 고
종은 건청궁(乾淸宮)에서 대신들을 접견하였고, 왕과 왕비의
침전은 장안당(長安堂)과 곤녕합(坤寧閤)이 이용되었다.
고종2년의 경복궁 중건은 임진왜란 당시 궁궐내의 전각뿐만
아니라 궁궐에 관한 문헌 및 도면 자료들마저 모두 불타 버렸
기 때문에 배치와 건물 하나하나의 구성에 기본이 되었을 고
제(古制)를 완벽하게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추정
복원 안은 고제(古制)에 가까운 새로운 형식의 궁궐이었을 것
이다. 그러나 이 복원 안이 그대로 중건 계획안이 된 것은 아
니며, 계획 과정에서 기준으로만 활용되었을 것이다70).
『북궐도형(北闕圖形)』과 『궁궐지』를 종합해 보면 중건
된 경복궁의 규모는 총 7,800여 칸에 달하며 단독 건물만도
150여 채가 넘는 방대한 궁궐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직
전의 상황으로 간주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명종 9년에 重新된
경복궁은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 비하면 총 칸수와 건물 수
가 훨씬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71) 또, 『실록(實錄)』이나
『일성록(日省錄)72)』등의 자료에서 궁장을 확장하려고 민가
를 헐어냈고, 특히 궁성 동북쪽과 서북쪽을 크게 넓혔다고 한
다. 이 때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 후원(後苑)을 조성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며,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후원이라고 하
는 것은 현재의 향원정 일대를 말한다73).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있었던 전각들은 근정전·사정
전·강녕정·교태전을 비롯한 50동 이상의 건물명이 발견된
다. 일부는 위치, 존재유무 등의 변화가 있었는데 사라진 건
물은 대체로 후침영역 및 후원에 있었던 것들이고, 위치가 변
69)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54
70) 이강근, 경복궁 중건, 대한걱축학회지35(2), p.32, 1991년 3월
71) 이강근, 전게서, p.32
72) 日省錄: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융희 4)까지 150년간 날마다 역
대 임금의 언동(言動)을 기록한 책.
73) 이강근, 전게서, p.32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61
위치 변화가
없는 건물
勤政殿, 思政殿, 康寧殿, 交泰殿, 麟趾堂, 含
元殿, 東宮, 慶會樓, 紫薇堂, 承政院, 弘文館,
典設司, 內醫院, 內班院, 欽敬閣, 璿源殿, 丕
顯閤 等
위치 변화
萬春殿, 千秋殿, 延生殿, 慶成殿, 日華門, 月
華門, 內司僕寺, 都摠府, 報漏閣, 尙瑞院, 尙
衣院, 藝文館, 資善堂, 司饔院, 淸讌樓 等
소멸된 건물
文昭殿, 養心堂, 兩儀殿, 延恩殿, 大明殿, 修
文堂, 關雎亭, 接松亭, 忠順堂, 淸凉亭, 淸心
亭, 序賢亭, 翠露亭, 華韓堂, 典涓司, 翠霞亭 ,
春秋館(藝文館에 통합) 等
궐 밖으로 이동 觀象監, 校書館, 承文院
표Ⅲ-1. 고종2년 중건에 의한 전각 변화
화한 것은 관서(官署) 영역의 일부 건물과 강녕전, 교태전의
부속건물이다. 새로 만들어진 만경전(萬慶殿)·수정전(修政
殿)·연길당(延吉堂)·응지당(膺祉堂)·자경전(慈慶殿)·태원
전(泰元殿)·회안전(會安殿)·건청궁(乾淸宮) 등 수천 칸에
달한다. 후침영역의 증설, 서북부 혼전 영역의 형성, 그리고
전반적인 밀도의 증가 등이 대표적인 확장이며 후원이 형성되
었다.
그 이유는 고종 5년 경복궁으로 이어할 당시 신정왕후 이하
삼전(三殿)이 생존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처럼 확대된 것으로 생각
된다74). 이는 기능적인 요구에 의한 후침영역 확장으로서 궁
궐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경회루 북쪽, 향원정 서쪽은 금천으로 경계지어져 있던 영
역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간의대(簡儀臺)·사복사(司僕寺)·충
순당(忠順堂)·서현정(序賢亭) 등이 존재하였다. 중건 이후
이곳은 혼전(魂殿)으로 변화하였다75).
고종2년 중건은 후침영역, 관서(官署)영역, 혼전(魂殿) 영
역 등 중심 영역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새로운
창건이 이루어져 많은 전각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전각들이 생
74) 조재모, 고종조 경복궁 중건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지16(4), p.39,
2000년 4월
75) 조재모, 전게서, p.39
62
겨났다. 이와 같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평면형과 건축 제도의
세세한 부분은 변화하였고, 경복궁 사용을 꺼리게 했던 불편
함을 해소하였으며, 생활과 집무에 편리한 공간으로서의 새로
운 경복궁이 창건되었다76).
⑥ 1900년대 경복궁의 현황과 『북궐도형』
대한제국기의 경복궁은 1896년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난
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14년간 계속 비어 있었다. 그
러나 선원전에 실(室)을 하나 늘리는 등의 계속적인 수리는
실시되었다77).
1905년 을사조약78)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황실이 일본의 간
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경복궁도 이전까지의 황실 주도의 수
리와 사용에 제한을 받게 되었다. 1907년 경회루 수리와 궁궐
내 전각 및 도로의 정비는 각종 원유회(園遊會)를 위한 것이
었고, 일제는 경복궁을 공원화하려고 하였다. 원유회 장소로
는 경회루와 후원이 주로 사용된 것 같다. 경복궁의 공원화는
1908년 3월 3일에 일반인에게 확대된다. 매주 일요일과 수요
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에게 관람을 허락하고, 관
람료는 10전이었다. 합방 직전인 1910년 3월 27일에는 경복궁
과 창덕궁의 건물을 일반에게 매각하는 광고를 낸다79). 황실
의 재산은 1908년 6월 25일 궁궐과 능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유화된다.
대한제국기의 경복궁은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그 운명
을 달리한다. 1905년 이전의 경복궁은 법궁의 지위는 잃었지
만, 궁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재정적 곤란 속에서도 보수와
저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5년 이후에는 일본의 간섭으로
궁궐의 권위를 헐어내고 공원화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러
한 공원화는 합방이 되고 난 후에는 더욱 가속화되어 시정 5
년(191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등의 박람회와 함께 공원으
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80).
1900년 대 초의 경복궁은『북궐도형(北闕圖形)』과 『궁궐
76) 조재모, 전게서, p.40
77) 문화재청, 전게서, pp.55~61
78)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79)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p.65~67, 2007
80) 문화재청, 전게서, p.61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63
지(宮闕志)』을 참고하여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경복궁의 원
형에 가까운 상태의 평면배치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조선총독
부가 1920년 3월에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가
있다. 『조선고적도보』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총15권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본인 건축가 세끼노 다다시[関野貞],
야쯔이 세이찌[谷井済一], 구리야마 슌이찌[栗山俊一] 등이
1904년부터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고적지를 조사하여, 실측도
면· 사진 등의 자료를 정리한 보고서를 조선총독부가 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중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에 관한 자료는
제10권에 실려 있다. 이 『조선고적도보』10권에 실려 있는
경복궁 평면배치도는 전각들의 현황과 거의 일치하므로 측량
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81). 이 평면배치도의 측량
년대는 총독부가 경복궁을 인수한 1911년 5월 19일 이후 1915
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및 예산안을 승인하
고 본격적으로 경복궁의 건물을 매각하기 시작한 1913년 3월
사이로 추정된다. 이 때 이미 소실된 전각에 관해서는 1920년
『조선고적도보』10권을 발행하기 전에 『북궐도형(1907년 제
작 추정)』을 참고로 하여 원형에 가까운 평면배치도를 작성
한 것으로 판단된다82).
『궁궐지』는 숙종대(1674~1720년) 에 편찬되어 헌종대
(1834~1849년)에 증보된 『궁궐지』와 고종 때 편찬된 『궁궐
지』가 있다. 이 둘은 고종 대 중건 이전과 이후의 모습에 대
해 비교가 가능하다. 고종대 궁궐지는 경복궁 한 권, 창덕
궁·창경궁 한 권으로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고종
대 궁궐지는 인쇄본과 필사본 두 가지가 있으며, 전각·부속
건물·궁장의 규모 및 양식·공포의 양식과 규모·기둥의 규
격 및 간격과 치수 등 매우 상세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편
찬시기는 『증보문헌비고』가 최종 작성된 1907년 이후인 것
으로 확인되는데 『북궐도형』과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
로 추정된다83). 『북궐도형』의 도면과 『궁궐지』는 내용이
거의 같아 이들은 같은 시기·동일주체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하면 궁궐의 건물 및 각종 조형
81)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하), p.29, 2007
82) 상동(上同)
83) 문화재청, 전게서, p.28
64
물의 위치·규모·형태·기능을 포함해 궁궐의 공간구조를 파
악할 수 있어 고종조 중건 이후 경복궁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북궐도형(北闕圖形)』84)은 경복궁과 경복궁 후원을 배치
도 형식으로 표현한 도면이다. 현재 알려져 있는『북궐도형
(北闕圖形)』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본 이외에도 규장각 소
장본이 있다. 이 두 소장본은 건물의 칸수 표기, 건물의 위
치, 담장의 위치, 측(厠) 및 내부 공간의 실(室) 표기, 석축
및 구조물 형상 등에 있어 상이한 부분이 발견된다85). 구체
적으로 중심 전각 및 그 권역은 별다른 차이가 없으마, 궐내
각사·소주방 권역, 외곽 건물들은 누락되거나 표현의 차이가
보이며, 석축이나 교량 어구 등은 실제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주변과의 상관관계를 기재한 것으로 석축의
단수 등은 실제와 같지 않다. 건물의 내부 실(室)에 대한 표
기는 행각 모서리나 누마루 등이 차이가 나 실제 상황을 그대
로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건물과 실의 명칭이 누락된 것
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본이 더 많았고, 두 소장본이 차이
가 나는 부분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규장각 소장본이 보다
더 정확했다. 규장각 소장본은 조선고적도보 경복궁 평면배치
도, 『궁궐지』에 기재된 사항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었다. 그
러나 규장각 소장본에 누락된 것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본
에 기재되어 있는 경우 『궁궐지』의 내용과 일치하므로, 어
느 소장본이 원본이고 사본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
다. 또 하나의 도형이 존재하거나 『조선고적도보』의 평면배
치도를 작성할 때 규장각 소장본을 참고하였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86). 이러한 두 소장본의 차이는 사본을 여러 개
만들면서 실수에 의해 생긴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북궐도형(北闕圖形)』은 원래 문화공보부 소관 장서각에
서 보관해오던 것을 1981년 문교부 산하 한국정신문화원87)이
새롭게 도서관을 신축하고 장서각소장 자료를 이관 받을 때
문화재관리국 소관으로 남았던 궁·능원 관련 자료를 국립문
84) 이곳에서는 2006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북궐도형』보고
서를 요약 정리한다.
85)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하), pp.27, 2007
86)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하), p.60,2007
87)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65
화재연구소에서 인계받아 자료실에 소장하여 온 것이다.
전체크기는 가로 2.84m × 세로 4.32m 크기의 『북궐도형』
과 가로 2.31m × 세로 2.82m 크기의『북궐후원도형(北闕後苑
圖形)』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라나 도면 내에 접혔던 자국으로 보아 원래 화첩으로 제작
된 것을 두루마리로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북궐도형』,『북궐후원도형』은 한 도면이 아니라 떨어져
있고, 연결해서 볼 수 있도록 좌우에 각각 ‘북(北)’과 ‘궐
(闕)’을 써넣어 표시하였다.
『북궐도형』은 미색을 띄는 한지 위에 붉은 잉크로 가늘게
방안을 구성하여 검은 잉크로 건물의 평면을 단선으로 그렸으
며, 건물 앞에는 건물의 명칭을 기입하고, 매 칸마다 방(房),
청(廳), 퇴(退), 누(樓), 주(廚), 고(庫), 허(虛), 문(門),
측(厠) 및 월랑(月廊), 마랑(馬廊), 복도(複道), 창비(唱備)
등 실의 용도를 기입하였다. 특히 문자가 기입된 위치가 건물
의 정면을 암시하고 있어 같은 행랑채에 구성된 각 실들이 어
느 쪽에서 사용된 것인지 구분할 수 있게 표기하여 놓았다.
『북궐도형』의 축척을 추정하여 보면 행랑과 침전 등의 건
물배치에서 대체적으로 8자(약 2.4m)의 크기를 갖는 1간(間)
규격과 방안의 규격이 비슷하게 합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방안의 규격은 건물의 1간(間)을 모듈로 설정된 것으
로 생각된다. 또 방안 1칸의 치수는 10~11mm로 종이를 배접하
고 건조수축 등의 영향으로 수축된 것으로 본다면 대략 12mm
정도로 볼 수 있으며, 방안 하나가 건물의 1간(間)을 의미하
므로 대체로 1/200 축척의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북궐도형』의 제작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략
1907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동궐도형(東
闕圖形)』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1908년 3월 25일
창경궁 내에 준공된 동물원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1909년 3
월 이전에『동궐도형』이 제작된 것처럼 『북궐도형』도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견해를 따른 것이다88).
『북궐도형』이 『동궐도형』과 함께 제작되었으리라고 본 이
견해는 그 제작시기를 1905년 1월부터 1908년 3월 사이로 보
88)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 계획보고서,
pp,104~107, 2002
66
았다.
이 시기에 두 궁궐에 대한 도형이 새롭게 작성된 이유는 대
한제국 황실이 경운궁에 옮겨가 있었고, 1907년에는 고종황제
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양위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1905
년 ‘을사조약’, 1907년 ‘한일협약’ 이후 거의 통치권을
상실한 순종이 창덕궁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이
다. 이러한 시기에 대한제국 황실의 필요에 의해 두 궁궐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한 도형화 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제실(帝室) 재산을 국유화하기 위한 조사가
1907년 6월 14일 임시로 설립된 기구인 ‘임시 제실유 및 국
유재산 조사국[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에 의하여 실시
되었는데 이때 『북궐도형』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89).
그러나 제작 방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묵선(朱墨線)으로
경위선을 긋고 그 위에 토지와 지형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조
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방법이다. 또한『북궐도형』에
방위표시나 축척이 표기되지 않은 점, 방안의 가로·세로 눈
금이 일치하지 않고 축척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은 점
등도 고려된다.
그러나 『북궐도형』은 일제가 단기간에 궁궐의 재산을 파
악하고 궁궐을 감시 경호하는 목적에서 도면을 작성한 것으
로 보이며, 도형과 함께 고종 연간에 작성된 『궁궐지(宮闕
志)』 역시 동일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실
록」에도 도형과 궁궐지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과 이
전에 간행된 『궁궐지』와 같은 기본형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건물의 규모와 구성을 기록한 『궁궐지』와
『북궐도형』이라는 상황을 종합하면 일제의 주도하에 작성된
것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이와 같
은 일들을 거리낌 없이 시행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이 일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경성부 내의 부지와 건물을 측량하여 지적도
화 시키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북궐도형』과 『동궐도형』은 대한제국에서 작성된 최초
의 배치 측량도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9)「財産調査局來去文」(규장각 17827), 내각[朝鮮]編, 1冊(148張). 隆熙
元年~2年(1907~1908). 1907년 8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임시제실유급
국유재산조사국’이 內閣에 보낸 보고서와 내각에서 하달한 訓令 및 指令
을 날짜순으로 모아 놓은 것.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67
일제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북궐도형』과 『궁궐
지』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경복궁의 근년 복원계획에
서 중요한 고증자료가 되고 있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
닐 수 없다.
『북궐도형』의 도면 제작 상에 보이는 특징은 건물의 주간
을 단선으로 칸 나누기 하고, 각각의 칸에 실(室)의 명칭을
기록하고, 또 방(房)·청(廳)·퇴(退) 등으로 각 실의 용도를
적어 놓고 있다. 또한 대문 및 현판의 표기는 건물의 정면에
표시하여 건물의 주동선을 밝혀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표기
방식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궁궐의 기본 구성을 배치도 형태로
읽을 수 있도록 제작해 놓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건물 내부의 실(室)은 방(房)·
청(廳)·퇴(退)·루(樓)·주(廚)·고(庫)·허(虛)·문(門)·
측(厠) 및 월랑(月廊)·마랑(馬廊)·복도(複道)·창비(唱備)
등으로 그 용도를 적고 있다. 여기에서 방은 온돌방이고, 청
은 마루이고, 퇴는 툇마루·누다락 또는 단이 높게 구성된 실
명(室名)이며, 온돌방과 누(樓)가 연접된 경우에는 누 하부에
불아궁이가 설치되는 경우가 많으나 하부의 실명은 표기하기
않았다. 주(廚)
68
그림Ⅲ-11. 『북궐도형』(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본, 전각 이름 삽입)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69
는 불아궁이가 있는 간(間), 고(庫)는 창고를 가리키며, 바닥
에는 마루·전돌·흙이 깔려있었다고 추정되나 바닥재료는 표
시하지 않았다. 문(門)은 대문간이고, 측(厠)은 뒷간이며, 허
(虛)는 벽체의 일부분이 없이 개방된 간(間)을 의미한다. 월
랑(月廊)은 근정전 행각 등에 길게 연속된 행랑을 의미하고,
마랑(馬廊)은 어마를 다루는 기관에 있는 행랑, 창비(唱備)는
문간 옆 급창(及唱)90)이 거처하는 간(間)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은 여러 종류의 실명이 표기되었는데 문자가 기입
된 방향이 건물의 정면을 암시하고 있어 같은 행랑채에 구성
된 실(室)들이 어느 쪽에서 사용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표기하고 있다.
침전의 주요 전각들은 건물의 정면 현판이 설치되는 간 앞
에 건물명을 기록하여 놓았고, 한 건물 여러 곳에 현판이 걸
린 경우에는 현판이 있는 모든 간 앞에 당호(堂號)를 표기하
여 놓았다. 기본적으로 침전의 경우는 실(室) 구성이 방
(房)·청(廳)·퇴(退)·누(樓) 등의 실(室) 명칭을 매 간 기
록하고 있으며, 건물 주변에는 주간(柱間)의 척수를 기록하면
서 동일한 척이 반복될 경우에는 양단에만 척수를 기입하여
중간 부분의 척은 생략하였다. 툇간도 연속될 경우에는 양단
에 퇴를 기입하고, 중간부는 역시 생략했다. 대청과 방에 고
주(高柱)가 있어 1간 반 이상으로 크게 구성된 곳은 간 나누
기를 보 방향만하고 도리방향을 중간의 나누기로 생략하여 실
(室)의 구성을 암시하고 있다. 건물 기단부는 전체적으로 표
현을 생략하고 있으나 강녕전(康寧殿)과 같이 별도의 월대(月
臺)가 있는 경우에는 월대와 계단을 표시하고, 남북 20척과
같이 척수를 기록하였다. 특히, 월대 계단에 귓돌91)이 있는
경우에는 소맷돌 단부를 둥글게 그려 넣어 귓돌의 형태를 암
시하고 있다.
소실(消失) 또는 이전(移轉) 등으로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
는 건물의 간 나누기는 표시하였으나 척수나 구조양식, 실명
등의 표현은 생략하고 당호(堂號) 아래에 금무(今無)라고 기
록하였다.
『북궐도형』에 그려진 건물 이외의 여러 시설물들에 대해
90)조선시대 관아에 속하여 원(님)의 명령을 간접으로 받아 큰 소리로 전달
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내종.
91)귓돌 : 돌로 쌓은 축대의 귀퉁이에 쌓는 돌
70
설명하면, 먼저 우물은 동심원의 겹원으로 그려 넣고 그 중앙
에 ‘정(井)’이라고 글씨를 써 놓았다. 우물은 대부분 원형
이나 정사각형도 있어 우물 형태에 따라 그려진 것으로 판단
된다.
연못 호안(護岸) 석축과 화계(花階) 등의 석축(石築)은 대
체적으로 8척 1칸 길이의 장대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석축의
높이에 따라 1단에서 4단까지로 구분하여 표현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려진 단수가 석축의 실제 단수를 그려 넣은 것은 아
니다. 석축의 표현 방식은 석축의 입면을 평면으로 눕혀 그렸
는데 협문의 표현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입면을 평면
에 표현하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재래적 수법이었다. 이와 같
은 표현방법은 실제의 지형을 모르면 어떤 부분이 높은 곳이
지 분간하기가 어렵지만 주변 건물이나 계단 등의 상관관계에
서 고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화계와 같이 평행하여 구
성된 여러 개의 석축을 직각으로 교차하여 그린 화계에서는
석축간의 고저차를 가늠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담장은 크게 궁궐을 감싸는 궁성과 궁궐 내의 영역을 구분
하는 것이 있다. 궁성은 방안의 크기와 같은 8자 폭으로 표기
되고 있고, 내부의 담장은 석축과 같은 2척 내외의 폭으로 그
려져 있다. 특히 석축과 담장이 복합된 경우에는 예를 들어
아미산 구간과 같은 교차되는 석축에 담장이 있는 짧은 구간
에는 장대석과 담장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도 보인다. 그러나
인접한 담장선과 연속되는 방향을 고려하면 담장과 석축의 구
분이 가능하다.
교량의 표현은 홍례문 안마당에 있는 금천교(禁川橋)의 경
우 다른 궁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쌍의 홍예교, 석난
간, 삼도(三道)로 구성되어 삼도에는 청판석을 깐 석교이다.
『북궐도형』에서는 이 금천교를 표현하면서 홍예 교 입면
을 평면도에 그려놓아 마치 특수한 형태의 석교로 오해하기
쉽다. 이것은 협문이나 석축의 표현과 같이 입면상의 특징적
인 부분을 평면도상에 식별 기호처럼 표기한 의도로 그려진
것이다.
『북궐도형』의 금천(禁川) 위에는 여러 개의 평석교가 산
재해 있다. 금천의 폭에 따라 중간에 교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교각이 없는 평석교는 단순히 장대석을 걸쳐놓은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71
것과 좌우로 귀틀석을 걸치고 그 위에 청판석을 깐 형태로 구
분할 수 있으나 대부분 장대석형 석교이고, 일부분만이 귀틀
석형을 하고 있다. 장대석형 석교는 장대석 수량이 2~6개로
일정치 않은데 용도에 따라 폭을 달리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교각이 있는 장대석형의 교량은 교각 위에 멍에석이 평면상에
보이고 여기에 장대석이 좌우로 배열된 모양을 그리고 있어
교각이 있고 없는 차이를 교각부 장대석 다리의 경우 장대석
이 개천의 흐름과 직각되게 놓여지나, 귀틀석형 다리는 청판
석이 하천의 흐름에 평행되게 배치되어 있다.
경복궁 북쪽에 있는 향원지(香遠池)에 걸쳐져 있는 취향교
(醉香橋)는 목교로서 교각열 위에 널판을 깔아 놓았다. 이 다
리의 북쪽 호안에만 담장선을 그리고, 담장선 중앙에 세 개의
원호를 연속해서 그려 놓았는데 이것은 벽돌로 쌓은 문[전축
(塼築)]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향원정(香遠亭)이 있는 연못의 명칭은 도형에 기록되어 있
지는 않으나 편의상 향원지(香遠池)로 불린다. 향원지는 대략
사방 34간(272척) 규모의 방형인데 네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그려 놓았다. 연못 중앙의 섬은 약간 북동쪽으로 치우쳐 있
고, 직경 11간(88척) 규모이며, 중앙에 육각정인 향원정이 자
리 잡고 있다. 이 섬의 북쪽에는 연못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
단이 표현되어 있다. 향원지 호안과 섬 호안에는 말뚝머리 같
은 원형 모양이 둘려져 있는데 이것은 호안을 보호하는 나무
말뚝을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향원정의 옛 사진에서도 확
인할 수 있다.
향원정(香遠亭) 당호 아래에 ‘二層 外木’이라 표기한 것
은 건물이 이층 정자이고 외목도리 건물이라는 의미이다. 이
와 유사한 것으로 궐내각사 권역의 숭양문에도 ‘二翼工 外
木’이라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서십자각(西十字閣)과 영추문(迎秋門) 중간 지점에는 내사
복사(內司僕寺) 담장 북쪽으로 일영대(日影臺)가 그려져 있
다. 이것은 해시계를 설치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대(臺)로 현
재 창경궁에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다. 일영
대에는 기단 북면에 붙여 계단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이것은
해시계의 바늘 그림자가 태양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돌면서 바
늘 북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시각을 보던 것이므로 북쪽 계
72
단을 설치하여 이곳으로 올라가 시각을 본 것으로 판단된다.
대(臺)의 규모는 사방 1.5칸(12척) 규모로 표현되어 있고, 계
단은 1칸 폭에 1칸 길이로 표현되어 있다.
향원정 남쪽 전방에 있는 집경당(緝敬堂) 권역에는 궁중의
음식 제조에 사용되는 장고(醬庫)가 동쪽에 2개소, 서쪽에 2
개소씩 각각 남북 종렬로 위치하고 있다. 동쪽의 장고(醬庫)
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이 3
개소 있으며, 각각의 장고에는 부속 창고를 담장에 붙어 4칸
과 7칸 규모로 설치하였다. 담장 안의 장독의 표현은 생략되
어 있다. 서쪽의 장고의 담장은 사다리꼴로 동쪽 장고의 담장
에 비하면 정형적인 모양을 띠고 있다. 특히 이곳의 남북 종
렬로 위치하고 있는 장고 사이에는 2.5간의 샛길을 두고 담으
로 구분하고 있고, 각각 출입문을 설치하여 놓았다. 남북 종
렬 장고로 들어가는 샛길 동쪽에는 일각대문인 예성문(禮成
門)이 설치되어 있고, 장고의 출입은 예성문(禮成門)이 아니
면 들어갈 수 없는 구조이다. 예성문은 장고 쪽으로 기재되어
있어 문 표기방식을 고려하면 장고 밖에서 문이 열리게 된다.
즉 장고가 외부가 되고, 문 밖이 내부가 되는 셈이다. 이곳의
장고는 사람이 상시 근무하는 곳이 아니므로 출입이 허용되는
인원만이 예성문을 열고 들어가 용무를 마치고 나와서는 다시
문을 잠그게 되는 정황을 고려하면 바깥마당에서 문을 개폐할
수밖에 없으므로 일반적인 문 개폐방식과는 다르게 설치되었
던 것 같다.
경회루(慶會樓)의 연못을 판 흙으로 조산(造山)한 것으로
알려진 교태전(交泰殿) 북쪽의 동산 명칭은 아미산(峨嵋山)이
다. 아미산은 중국 산동성 박산현(博山縣)에 있는 아미산을
본 딴 것으로 이곳은 절경으로 유명하다.『북궐도형』에서는
경회루 동북쪽에 아미산이 표현되어 있으며, 동서로 긴 장방
형에 약 15칸×27칸 규모로 그려져 있고, 3단의 화계가 삼면
에 조성되어 있으며, 화계 동쪽은 자미당(紫薇堂) 행각 담장
에 면해 있다. 아미산에 있는 굴뚝은 표현하지 않았다. 아미
산 서쪽에는 정면 6간, 측면 1.5간의 건물에 심채고(沈菜庫)
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김치를 저장하는 곳간를 이르는 것
이다. 침채는 김치의 옛말이다.
다음으로 대문간에는 외부에서 진입하는 방향으로 ‘門’을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73
기재하고 있어, 대문간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고 있다. 대문
에 현판이 있을 경우에는 현판이 있는 위치에 명칭을 기록하
고 있다. 두 칸으로 구성된 문 중에서 정문과 편문으로 구성
된 경우에는 편문을 정문의 남쪽에 배치하였다. 담장에 설치
되어 있는 협문은 ㄷ자형과 반원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자
는 목조 협문을 뜻하고, 후자는 전축(塼築)의 홍예형 문을 구
분하여 놓은 것이다. 이외에도 특이한 것으로 ㄷ자형의 양쪽
모서리를 깎은 표현이 있는데 『동궐도형』에서 ‘불로문(不
老門)’을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불로문의 단일 석재를
ㄷ자형으로 만들었으나 양쪽 어께 부분을 둥글게 표현한 것은
실제의 모양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문이 열리는 방
향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문을 눕혀 놓은 형태로 표현하였고,
문의 명칭도 바깥쪽에 기록하고 있어 협문의 내·외부를 구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협문에 속하는 것 중에서 특이한 것은
향원정 북쪽 취향교(醉香橋) 북단에 있는데 원호 3개를 연결
하여 그려 놓았다. 연못 쪽에 그려진 겹선은 취향교의 교대로
볼 수 있으나 규격이 작아서 장대석 표현이 생략된 것으로 추
측되지만 사진 자료에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취향교에 표시
된 협문과 유사한 것으로는 궐내각사 권역에 검서청(檢書廳)
동남쪽 행각과 행각 사이의 통로에 단선으로 취향교(醉香橋)
문과 유사한 표현이 있는 바 목재의 판문을 3간의 홍예문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전축문 또는 협문과 구분하기 위해 단선으
로 표현한 것이라 판단된다.
건춘문 남측으로 12칸 거리에는 궁장에 1칸의 문이 있고,
영추문과 서십자각 중간 부근에도 작은 문이 있다. 이것은 산
성의 암문과 같은 것으로 경호용 또는 특수한 경우에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출입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북쪽 신무문
근처의 궁장에는 신무문 동쪽으로 1간 홍예문인 계무문(癸武
門)과 다시 그 동편으로 1간 홍예문인 광무문(光武門)이 있
다. 이 문은 경복궁에서 후원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한 편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Ⅲ-12은 『북궐도형』과 『궁궐지』를 종합하여 ‘금무
(今無)’라고 한 건물들을 표시한 것이다. 이를 보면 궁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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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의 직소(直所), 궐내각사의 일부 전각, 수정전 주위 행각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쪽 영역은 만화당
(萬和堂)과 행각, 다경합(多慶閤)과 행각, 영보당(永寶堂),
자미당(紫薇堂), 인지당(麟趾堂)과 행각, 근정전 동쪽 행랑
밖의 춘방(春坊) 및 계방(桂坊) 그 주변 전각, 계조당(繼照
堂) 행각, 건춘문(建春門) 안쪽의 별감방(別監房), 훈국군번
처소(訓局軍番處所), 동십자각(東十字閣) 안쪽의 동·남 소부
장청(所部將廳), 충장장청(忠將長廳)이다. 이 들 건물중 회안
전(會安殿)과 문경전(文慶殿), 만화당(萬和堂)과 그 주변 행
각들은 경운궁으로 이전되었다고 『북궐도형』에 적혀있고,
자미당과 인지당은 1876년 화재 이후 교태전·강녕전 등 주요
내전전각들과 함께 불에 탔으나, 고종 25년(1888)에 다시 중
건하였다. 그러나 북궐도형 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로 표
현되어 있다.
궐내각사 지역에 존재하는 건물은 ‘始政5年記念 朝鮮物産
共進會場 平面圖(그림Ⅲ-9 참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평
면도에 표현된 건물의 형태는 위에서 설명한 건축물의 형태와
완전 일치한다92).
92) 문화재청, 전게서, p67, 200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75
그림Ⅲ-12. 1900년대 소실된 전각들(진회색 부분, 인용:경복궁 변천사(상), p.6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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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일제강점기 때의 변화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은 거의 원형을 잃었다. 일제는 조선
의 법궁을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경복궁은 그 모습을 잃어갔다93).
첫째, 1910년 경술국치 전후의 경복궁 건물 매각
둘째, 1915년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
會)94)를 위한 경복궁 정리
셋째, 191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과 그 부설 건물 건립
을 위한 부지정리
넷째, 1918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 복원을 위한 경복
궁 내전 전각의 이건
다섯째, 1923년 기타 전차 개설 등으로 인한 경복궁 궁역의
훼손
여섯째, 1929년 조선박람회로 인한 궁장 훼철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경복궁에서 황후를 잃는 비극
을 겪은 뒤 1896년 러시아 공관으로 이어한다. 경복궁은 또다
시 빈 궁궐이 되었고, 융희 2년(1908) 퇴락해 가던 경복궁이
입장료를 받고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일제에 의한
일반공개는 경복궁을 더 이상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 못하
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와 함께 전각들에 대한 훼철이 심
하게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민비가 시해당한 건청궁(乾淸宮) 권역이 없어지게
되었다.95) 이외에도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 벌써 경복궁의
전각 4,000여 간이 경매에 넘겨져 방매되었다. 『북궐도형』
의 칸수는 6,806간이며, 중건 당시 궁궐지에 기록된 칸수는
7,714간이다. 이렇게 볼 때 4,000여 간은 거의 2/3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장소로 이용된 공간
은 주로 동궁 권역이었는데 이 시기 훼철된 전각 들은 주요
전각을 제외한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남겨진 전각은 공
진회 준비 당시 남아 있던 건물과 거의 일치할 것으로 보인
93)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65, 2007
94) 각종 산물이나 제품들을 한곳에 많이 모아 놓고 품평하고 전시하는 모
임. 품평회와 박람회를 절충한 것이다.
95) 문화재청, 전게서, p.68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77
다.
그림Ⅲ-13.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남아 있던
전각(도면인용:경복궁변천사(상),p.7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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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Ⅲ-14.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의 경복궁 공간 구성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79
경복궁이 공식적으로 총독부에 인된 것은 1911년 5월 이었
다. 완전 인계 후에 총독부는 경복궁을 공진회 등의 박람회
개최장소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경복궁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3월에 열린 제31회 제국회의에서 물산공진회(物産共
進會)의 개최를 결정하고 예산의 협찬을 의결하였다96). 조선
총독부는 시정(施政) 5년을 맞이하는 1915년에 대대적인 선전
을 획책하고 그 하나의 방편으로 물산공진회를 열기로 한 것
이다. 동년 8월 물산공진회의 평의원 규정과 사무원에 대한
모든 사항이 결정되어 예규(例規)를 만드는 동시에 진열관 건
물의 배치 공사 방침 등이 정해지면서 그 장소로서 경복궁을
고시(告示)하였다.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으로 박람회장이 정해진 이유는 교통의 편의,
비용의 절약, 평탄한 지형, 잔존한 고궁전각의 관광효용성 등
을 들고 있다. 공진회의 규칙 이외에 출품되는 물품의 유형
범위(類型範圍), 방법, 그리고 그들에 대한 심사, 관람규정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참고품으로 출진이 가능한 국내의 생산품
도 결정 고시하였다.
1915년에 들어서면서 출진(出陣)하는 물품의 통관규정(通關
規定)이 고시되고, 관람자를 비롯하여 출품자의 임금 운임 등
에 대한 할인 혜택도 고시하였다. 경복궁 내에서의 공진회 규
모를 보면 총독부 예산 50만원을 포함하여 총 70만원으로 정
하고, 부지는 총 78,000평, 진열관이 5,352평, 출품한 인원수
는 18,976명 42,026점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9월 11일 근정전(勤政殿)에서 개장식을 열어 공진회가 시작
되었다. 공진회 기간 10월 31일까지 총 1,604,383명의 관람자
가 거쳐 갔다. 공진회가 끝나자 11월 19일 그 자리에 박물관
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12월 1일 공진회 미술품 진
열관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서 개관되었는데 이것은 19세기
이래로 박람회 장소에 반드시 박물관이 마련되는 세계적인 추
세에 따른 결과였다.
총독부 박물관은 주로 고적조사(古蹟調査)에 의한 수집품,
매장유물(埋藏遺物)의 국고 귀속품, 그리고 구입품과 각 사찰
96) 서울특별시, 서울 600년사 홈페이지, http://seoul600.visitseoul.ne
t/seoul-history/sidaesa/txt/6-6-14-1-3.html
80
의 기탁품 등이 주축이 되어 역사미술공예에 관한 자료를 수
집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물산공진회 때의 유일한 내화건물(耐火建物)인 미술
관 건물을 본관으로 한 총독부박물관은 경복궁내 궁전의 일부
를 이용하여 전시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건물은 당초
박물관에 알맞게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장소가 우선
협소하고 전시실의 구조나 채광 순로(順路)가 전혀 맞지 않았
다. 게다가 협소한 전시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방화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근정전(勤政殿), 수정전(修政殿), 사정
전(思政殿) 등을 사용하여 일시적인 미봉책을 썼으므로 개관
하면서부터 커다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 인건비 관계
로 근정전과 사정전은 폐쇄한 채 필요할 때에만 특별히 열어
서 공개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총독부박물관이 협소하고 불편한 시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여망(輿望)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종합박물관 건립을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고 1935년 1월 25일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협의회에서 박물관 부지를 대지공사비가 적게 들 것이라는
판단 아래 경복궁 내로 결정하고, 착공하였으나 대동아전쟁으
로 인하여 기초공사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야냐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아사
가와 타쿠미[淺川巧]에 의해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
館)이란 이름으로 경복궁 집경당(輯敬堂)에 미술관이 개관되
었다. 이곳은 한국 독립 후 국립민족박물관(國立民族博物館)
으로 개관되었다.
조선물산공진회97)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50일 동안 개최되었고, 경복궁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박람
회의 시작이었다.98)
근대에 시작된 박람회는 제국주의와 관련하여 각국에서 유
행했는데 “박람회 시대는 곧 제국주의의 시대였다”99)라고
할 만큼 박람회 개최국은 문명이 발전한 사회와 미개한 사회
를 비교하는 척도로 인식되었다. 즉 박람회는 지배국의 우월
97)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는 전시회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으나 그 당시
의 박람회의 규모와 맞먹어 공진회 개최는 전시회 또는 박람회와 같다.
98)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70
99) 요시미 순야(吉見 俊哉), 박람회 근대의 시선, 서울, 논형, p.210,
2004(문화재청, 전게서, p.70. 재인용)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81
함을 피지배국에 알리고, 그 지배의 타당성과 당위성을 보여
주는 좋은 방법이었다100). 일본도 이러한 세계적인 조류에
편승하면서 조선에 갖가지 박람회를 기획하였다.
공진회장 구역은 자경전과 교태전을 잇는 평행선의 이남 부
분이 이용되었고,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부와 동부에 회장이
꾸며졌다. 총 사용면적은 72,800평에 이르렀고, 공진회 정문
으로는 광화문, 건춘문 및 영추문은 통용문으로 사용되었다.
근정전 동쪽 동궁지역과 홍례문 권역에는 새로운 전시관이 들
어섰고, 근정전과 그 북쪽 궁월 전각들은 전시에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주로 회장의 개회식 및 폐회식 등의 의식과 공진회
진행을 위한 사무실, 심사실, 경비실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
다. 영추문 내측, 경회루 주변 지역은 각 도 휴게소 및 협찬
회 경영에 관련된 매점 또는 여흥장·음식점 등이 들어섰다.
그림Ⅲ-8의 공진회장 평면도를 보면 향원정 서쪽 집옥재·
팔우정·협길당 일곽이 남아있고, 『북궐도형』이 그려질 당
시에 경운궁으로 이전된 회안전·문경전 일곽은 보이지 않는
다. 또 태원전·숙설소·세답방 등이 모두 없어진 상태이나
제사 건물인 태원전 제사실만은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
다. 향원정 동쪽의 선원전 영역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선원전은 1932년에 철거되었고, 이 일대의 건물이 완전 철거
된 것은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현 민속박물관)의 건립 때문
이다.
향원정 남쪽의 함화당·집경당은 현재까지 남아 있고, 향원
정 남쪽과 동남쪽의 흥복전과 만경전은 1917년 창덕궁 화재
때 경복궁 내전 건물과 함께 창덕궁으로 이건(移建)되었다.
경회루 남쪽 영역의 궐내각사는 비교적 많은 전각이 남아
있었다. 대전장방(大殿長房)101)·동서행각·주원(廚院)102)·
내반원(內班院)·선전관청(宣殿官廳)103)·빈청(賓廳) 등이
남아 있었다.
100) 문화재청, 전게서, p.70, 2007
101)大殿長房 : 왕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의 공간(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p173, 청년사, 2005)
102)廚院 : 사옹원(司饔院)을 뜻한다. 궁궐의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담는
그릇을 조달하는 관청(홍순민, 전게서, p.173).
103)宣殿官廳 : 선전관의 관사(官舍). 선전관(宣傳官)은 조선시대 형명(形
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무
관직.
82
⑧ 조선총독부 신청사와 경복궁의 변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통감부 대신 총독부를 설치하
였다. 통감부는 남산의 산록 현재의 예장동 8번지 일대로 왜
성대(倭城臺) 또는 화장대라고 불렀다. 통감부를 총독부로 사
용하고 있었으나, 총독부의 규모가 커지자 신청사의 건립이
필요해 졌고, 그 부지로 경복궁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1912년 세워진 것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는 그 기
초 작업을 다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104).
총독부 건물의 설계는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독일인
건축가 조르주 드 라랑드(George de Lalande, 1892~1914)105)
가 맡았다. 라랑드는 총독부 설계 이전, 서울 조선호텔을 설
계한 바 있으며, 1913년에는 평양 모란대공원을 계획한 바 있
다.
1912년에 시작된 총독부 청사의 기본 설계는 1914년에 마무
리되었는데 라랑드는 설계를 끝내지 못하고 1914년 급사하게
되어 일본인들에 의해 설계안이 완료되게 되었다. 라랑드의
후임으로는 대만총독부 청사설계의 경험이 있는 대만총독부
칙임관(勅任官) 기사였던 노무라 이찌로[野村一郎]가 맡았으
며, 그 아래로 총독부 건축과장 이와이 나가사부로[岩井長三
郎]와 주임기사 쿠니에다 히로시[国枝博]·후지오까 쥬우이찌
[富士岡重一]·이와쯔끼 요시유끼[岩槻善之]가 작업하였
다106).
총독부 청사 건립은 1916년 시작하여 약 8년이 경과된 1926
년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추어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총독부 건립 계획 당시의 평면도가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다(그림Ⅲ-10 참조). 계획 당시 평면도 2안 중에서 채택된
것은 계획안2이며, 이것은 근정전의 축에 맞추어져 있다. 경
104)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79, 2007
105)독일인 건축가 라랑드는 1872년 9월 6일 프러시아 Silesia지방의
Hirshberg(현재는 폴란드)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를린 의 고
등학교를 졸업한 후 비엔나, 베를린 등에서 건축활동을 하다가 1901년
중국의 상해·천진을 거처 1903년 일본에 도착하여 요꼬하마에 있는 독
일인 Richard Seel의 건축사사무소에 있다가 1909년 독립하여 동경에
자신의 사무소를 내고, 빈에서 시작된 분리파(Sezession)를 가미한 유겐
트스틸(jugendstill) 작풍의 설계를 했다(손정목, 조선총독부 청사 및 경
성부 청사 건립에 대한 연구, 향토서울48, pp.70~71, 1989.10).
106) 문화재청, 전게서, p.80, 2007, 총독부 청사 당시 설계 계획안은 매일
신보 1916년 6월 27일자 신문에 투시도와 함께 실려 있다.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83
복궁 원래의 공간 구성에서 근정전 영역, 강녕전·교태전 영
역, 경회루 및 향원정 궁원 영역, 집옥재 영역은 그대로 나두
고, 나머지는 서양식 자수화단(刺繡花壇) 정원으로 채워 놓고
있다.
그림Ⅲ-15. 총독부 청사 건립 계획안1(왼쪽)과 계획안2
총독부 청사 건립으로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은 경복궁 서남
궐내각사 영역이었다. 이 영역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장 때
원형이 많이 남아 있었던 지역이었다. 또한 광화문의 위치가
건춘문 북쪽으로 1927년 이건되었다. 동십자각은 현재와 같은
경복궁 궁장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은 1929년 조선박람회
때였다. 이후 1938년 근정전 서쪽에 있던 선전관청이 철거되
었고, 그 터에 제1별관, 제3별관, 기계실·문서고 등이 건립
84
되었다.
총독부 청사가 준공된 후, 1927년 일제는 총독부 청사구내
에 정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총독부 청사 동쪽에 야구장, 북쪽
즉 근정전 회랑 동서쪽에 테니스장을 만들었고, 4백m 직선트
랙도 만들었다. 4백m 직선 트랙은 현재 관람객용 주차장 자리
이다. 청사 북쪽의 테니스장은 제5공화국 시절까지 남아있었
으며107), 경복궁 궁내에는 수십개의 잔디밭과 정문을 들어
서면 양쪽에 대칭적으로 식재를 하는 계획을 세웠다.
107) 국립중앙박물과, 舊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보고서, p.46,
199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85
그림Ⅲ-16. 1927년 총독부 정원공사 때의 경복궁 평면배치도(국가기록원 소장)
86
년 도 박 람 회 명 칭 주 최
1915년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총독부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조선농회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 조선축산협회
1926년
조선박람회
(제1회장 : 왜성대 총독부 舊청사
제2회장 : 경복궁 )
조선신문사
표Ⅲ-2. 일제강점기 시대 경복궁에서 개최된 박람회
근정문(勤政門) 앞을 흐르던 금천(禁川)과 영제교(永濟橋)
는 이 시기에 없어지게 되었다. 어구(御溝)는 서쪽 원 궐내각
사 영역으로 이설(移設)하고 영제교(永濟橋)는 수정전(修政
殿) 앞으로 이전되었다108). 이 후 영제교는 1997년 복원공사
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복원되었다.
경복궁의 내전 건물은 1917년 창덕궁의 화재로 인하여 전각
이 이전된 것이 큰 변화 요인이었다. 창덕궁 화재는 대조전
서온돌에 연결되어 있던 내인들의 갱의실에서 시작되어 대조
전·흥복헌·통명문·양심합(養心閤)·장순문(莊順門)·희정
당(熙政堂)·찬시실(贊侍室)창고(倉庫)·경훈각(景薰閣)·징
광루(澄光樓)·옥화당(玉華堂)·정묵당(靜黙堂)·요화당(曜華
堂)·요휘문(曜暉門)·함광문(含光門) 등의 건물들이 전소되
었다. 낙선재를 임시 이어처로 정하고 1919년 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을 옮겨 중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철거·이건된 경복궁의 전각들은 교태전·강녕전·동
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慶成殿)·연생전(延生
殿)·응사당(膺社堂)109)·흠경각·함원전·만경전·흥복전이
옮겨졌다. 흥복전 터는 그 후 곡수지를 파고 동산을 만들어
일본식 정원이 만들어졌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이후 경복궁에서는 몇 번의 박람회
가 더 기획되었다. 또한 박람회 뿐만 아니라 순직경찰초혼제
와 같은 기념 행사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경복궁에서 열린 박람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08)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86, 2007
109) 응사당은 응지당(膺祉堂)을 이른다.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87
1929년 시정20년 기념 조선박람회 총독부
1935년 조선산업박람회 조선신문사
이 중에서 1929년 시정20년 기념 조선박람회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된 후에 처음으로 개최된 박람회로 매우 규모가
컸다. 조선박람회는 경복궁 전체를 이용하여 개최되었고, 정
문으로는 동쪽으로 이건된 광화문이 이용되었다.
조선박람회를 통해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경회루로 이어지는
새로운 동서 축이 형성되었고, 동십자각이 궁장에서 완전 떨
어지게 되었다.
그림Ⅲ-17. 1929년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박람회 팜플렛(인용: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
p.91. 2007)
88
구 분 건 물 명 건립연대 비 고
근대
건물
총독부청사 1926년 1997년 철거
총독부청사 제1별관 1938년 ―
총독부청사 제2별관 1938년 ―
총독부 미술관 1915년 1995년 철거
표Ⅲ-3. 해방 직후 경복궁에 남아 있던 주요 건물(인용 :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95, 2007)
경복궁의 영추문과 서십자각은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를
기획하면서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광화문 앞에서 영추문 방
향으로 이어지는 전차선로가 연장되면서 철거되었다. 개통된
구간은 광화문 앞(공진회 입구)에서 통의동(공진회 출구)까지
였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191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계획 시
에 경복궁 근정전 뒤쪽 담장의 동서 연장선을 축으로 하여 그
북쪽은 공원 부지, 그 남쪽은 총독부청사 부지로 구분하고,
동궁 일곽은 광장, 선원전 일곽은 야외음악당, 집경당 일곽에
는 분수대를 설치하고,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건청궁은 철거
후 화단을 꾸미고, 총독관저를 비롯한 총독부 관료들의 관사
부지로 계획하였다110).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박람회장으로
이용되면서 원활하게 이행되지 못하였다. 1915년 공진회 당시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전용되
었고, 현재 경복궁관리소는 박물관 창고로 건립된 건물이다.
1935년 한일합방 25주년 기념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박람회장
건물은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이용되었다.
⑨ 1945년 해방 이후의 경복궁
1945년 해방 이후의 경복궁 전각들의 기능은 일제강점기 때
의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舊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
군정이 사용하면서 중앙청(中央廳)이라 명명되었고, 1948년
제헌국회 개원, 동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등의 중
요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은 1945년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고, 사정전·만춘전·천추전 등의 건물
은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일부 전각들은 관
사 등으로 사용되었다111).
110) 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 계획보고서, p.38,
2002
111)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96, 200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89
년 도 행 사 명 칭 주 최
표Ⅲ-4. 해방 직후 경복궁에서 열린 행사 일람
(1박91물5년관 으공로진 회사 용이)후
총독부 박물관
부속건물
1915년 현 경복궁 관리소
총독부 미술관 1935년 1999년 철거
전통
건물
광화문 고종 2년(1865) 1926년 총독부 청사 건립으로 1927년 9월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
건춘문 〃경복궁 동문
신무문 〃경복궁 북문
동십자각 〃1927년 광화문 이건으로 현재와 같이 궁장에서 이탈됨
근정전 고종 4년(1867) ―
근정문 〃―
근정전 회랑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융문루·융무루
사정전 〃경복궁 편전
사정문 〃경복궁 편전 정문
사정전 남·북 행각 〃사정전 주변 행각
천추전 고종 2년(1865) 경복궁 서편전(西便殿)
만춘전 고종 3년(1866) 경복궁 동편전(東便殿). 1950년 한국동란 때 파괴되어 기단만
존치. 1988년 복원
수정전 고종 4년(1867) 경복궁 편전
무명각 일제강점기 때 건립
추정
수정전 남측의 한식건물, 1998년 철거
경회루 고종 4년(1867) 외국 사신 접견, 궁중 연회장
자경전 및 행각 고종 2년(1865) 신정왕후(神貞王后) 별당. 고종 10년과 고종 13년 두차례 화재로
소실. 고종 25년(1888) 재건
제수합 고종 4년(1867) 자경전 별당(別堂)
함화당 고종10년(1873) ―
집경당 〃―
향원정 〃향원지에 건립된 2층 육각정
집옥재 고종28년(1891) 창덕궁에서 이건
협길당 〃고종의 서재. 창덕궁에서 이건
팔우정 〃장서고
경안당 고종 2년(1865)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현 민속박물관) 건설로 철거
향당 고종 2년(1865) 〃
정훈당(동당) 〃〃
경복궁 궁역 전체도 일제강점기 시대의 행사의 장소로 이용
되었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다음 표Ⅲ-4와 같은 성격
의 행사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 경복궁은 문화
재로서의 가치보다는 행사를 개최하는 연유(宴遊)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90
1945년 7월 4일 문맹퇴치 하계학생계명운동 출동식
1946년 4월 26일 조선 농산 공예품 전시회 조선농회
1960년 10월 14일 아메리칸 카우보이 쇼 조선일보
1962년 5월 16일 5.16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사업박람회
해방 직후 경복궁의 관리는 구(舊) 황실재산총국에서 미군
정 아래에서 관리업무를 시작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문교부에 문화국 교도과가 만들어지면서 문화재
보존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경복궁 관리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⑩ 한국전쟁 전후의 경복궁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전국에 산재하고 있던 문화유적과 유
물의 내용조차 파악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1952년 12월 19
일에 와서야 문교부에 의해 ‘국보명승고적천연기념물임시보
존위원회’가 구성되어 파괴된 문화재의 보수대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1955년 2월 17일에는 문교부에 문화국 문화보존과가
설치되어 문화재 관리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112). 그러나 예
산이 없어 허물어져 가는 문화재 보수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
황이었다. 또한 전쟁으로 조선박물관 창고 기능을 수행하던
만춘전과 사정전 북행각 일부가 파괴되어 그 피해는 실로 심
각하였다. 궁궐 내 파괴된 건물들은 이후 한미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리하게 되었고, 1953년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른다.
이때는 관계법령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 문화재 보존업무
가 아닌 국가재산의 현상유지를 위한 관리만이 중점적으로 행
해지게 되었다.
112)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98, 200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91
그림Ⅲ-18. 1951년 경복궁 전경(인용:경복궁 변천사(상), p.98, 2007)
⑪ 1960~1970년대 경복궁
1960년대에는 문화재보호정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국보
제1호인 ‘숭례문 중수(重修) 공사’를 계기로 전국에 산재되
어 있던 문화유산의 보존에 힘을 쓰게 된다. 1961년 7월에는
사적지와 사찰 등에서 향연장의 전용을 금지하고, 1962년 1월
에는 문화재보호법을 반포하였으며, ‘문화재 보수 연차계
획’ 및 재원확보를 위한 ‘잡종재산처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잡종재산처분계획’은 문화재관리국이 소유하고 있
는 국유재산 중 영구보존 및 행정재산을 제외한 잡종재산을
처분하여 경개발 5개년 계획의 재정자금으로 사용하고, 그 잔
액을 문화재 보수 연차계획의 재원으로 사용하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재원을 확보함에 따라 문화재 보수가 활발하게 진행되
었다113). 이렇게 마련된 문화재 보수비용으로 1962~1965년까
92
지 경회루 외 4건 등의 굵직한 문화재를 보수하였다.
이 당시의 경복궁에 대한 보수는 1961~1967년까지 집옥재·
협길당 등의 부분 보수 공사를 시작으로 31건의 공사가 이루
어졌다. 그 내용은 대부분 보수·단청·정비공사가 중심을 이
루었고, 경회루·근정전·사정전 영역이 중심대상지였다114).
1966년 1월부터 5개년 공사로 착공되는 국립종합박물관(현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건립 등에 재원이 집중되면서 문화재보
수공사가 줄어들게 된다. 특히, 1967~1969년에 행해진 광화문
복원사업에 대통령 및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1964년 전쟁으로 파괴되어 10여 년간 방치되었던 중앙청 복
구공사가 2년여의 공사 끝에 완료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출동한 30사단 1개 대대병력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로 명칭을 바군 뒤 경복궁 서북쪽 태원전 권역
에 주둔하게 된다. 30경비대대는 주둔 이후 천막막사를 사용
하지만 월동의 어려움으로 1965년 반영구막사의 신축을 계획
한 후 문화재관리국과 병력 철수 후 철거하는 조건으로 신축
하게 된다. 결국 퀸셋 20동과 콘크리트 블록 5동 등을 지었으
며, 이같은 상황은 30경비대대가 철수하는 1996년까지 지속되
었다.
1963년 1월 21일에는 경복궁이 사적 117호로 지정 보호되게
되었다. 1966년에는 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국립종합박물관의
현상설계를 공모하고, 창조보다는 모방에 비중을 두는 내용의
공고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법주사 팔상전·화엄사 각황
전·금산사 미륵전 등 9개의 전통건축을 확대·조합한 작품이
선정된다. 이 설계안은 경복궁 영역 내의 전통건축과 조화되
지 못한 이질적인 건물을 건립하고, 기존의 문화재인 경안
당·대향당(戴香堂) 등 9동 106칸의 전각들을 훼손시키는 정
책적 모순을 보였다115).
해방 이후 경복궁에는 이질적인 현대적 건물들이 차례로 들
어섰다. 1950년에는 경회루 북서쪽에 이승만 대통령의 휴식
겸 낚시를 위한 하향정(荷香亭)이 들어섰다. 1972년에는 국립
종합박물관이 완공되었고, 기타 매점과 화장실 등의 편익시설
113) 문화재청, 경복궁 변천사(상), p.99, 2007
114) 문화재청, 전게서, p.99, 2007
115) 문화재청, 전게서, p.101, 200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93
건 물 명 건 립 연 대 양 식 비 고
하향정 1950년대 전통 한식목조건물
30경비대대 내 구조물 1961년 이후 현대 숙소, 식당, 업무 시설 등, 1996년 철수
국립종합박물관 1972년 현대 1966년 착공, 1972년 준공, 현 국립민속박물관
제2별관 1970년 현대 구(舊) 문화재연구소, 2004년 철거
후생관 1979년 현대 구(舊) 문화재관리국 청사, 현 고궁역사박물관
을미사변 기록화 전시각 1982년 전통 한식목조건물
표Ⅲ-5. 해방 이후 신축된 건물(인용 : 문화재청, p.101, 2007)
들이 궁내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현대식 건물이 대부분으로
주위 환경과 조화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1970년대 경복궁의 관리 상황은 문화재 관리를 위한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관계로 입장료 수입·매점·놀이공원 등의 임
대를 통한 수익금을 모은 돈으로 직원들의 월급을 지급하고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116). 경복궁은 입장료 수입이
창경원에 비해 미비하였기 때문에 예산을 확충하기 위해 문화
재 보존보다는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
다고 한다117). 또한 직원들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도 낮
았으며, 문화재 보존 체계도 확립되어 있지 않아 실무자의 입
장에서 판단하여 문화재를 관리하는 것이 현실이었다고 한다.
경복궁 관리에 대한 기본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상황은 1984년
궁궐 관리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된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118).
⑫ 1980년대 경복궁
1970년대 국토개발사업이 최우선 시책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문화재 보호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들어나게 되었
고, 이는 1982년 문화재 보호법의 전문개정으로 이어지게 된
다. 그 내용은 문화재 분류 및 용어의 재정리, 관리체계의 합
리화 도모, 국가지정문화재의 국가매입 및 보존 의무화 등이
큰 골자를 이룬다.
경복궁 등 궁권 내의 문화재에 대해서는 사적지로서 전체를
지정할 것이 아니라 중요 전각에 대한 개별 지정이 필요하다
116) 문화재청, 전게서, p.103, 2007
117) 상동(上同)
118) 상동(上同)
94
는 주장이 재기되었다119). 이 후 1985년 총 18건의 경복궁내
의 중요 전각 및 석조물에 대해 국보 및 보물 지정이 이루어
졌다. 이 때 지정된 내용을 보면 경복궁이 사적117호, 근정전
이 국보 223호, 경회루가 국보 224호, 자경전이 보물 809호,
자경전 십장생굴뚝이 보물 810호, 아미산 굴뚝이 811호, 근정
물 및 행각이 812호, 동십자각이 시도유형문화재 13호 등이
다120).
1984년 5월 22일 ‘조선 왕궁의 복원정화 및 관리개선방
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왕궁 본연의 위상과·품격·보
존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 계획
의 일환으로 1984년 8월에는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승격시키
고, 동물원·식물원의 철거 및 복원·정비 공사를 시작하여
1986년 완공하게 된다.
이때의 문화재위원회 회의록 중 경복궁 관련 사항을 추려
보면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등이 있어 사회교육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내외국인에게 조선왕궁의 궁제를 이해시
키게 하는 사적 기능을 겸비하고 있다는 내용이 주가 되고 있
다. 따라서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사회교육적 기능
을 강조하기 위해 보수·정비·관리를 유도하고, 궁궐과 관계
없는 석조문화재전시·그림대회·백일장 등의 활용적인 측면
이 강조되고 있다.
이후 경복궁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만춘전 의 복원공
사(1988년)가 이루어지고, 드디어 1989년 경복궁의 중창(重
創)이 이루어진 고종 4년(1867)을 복원의 시점으로 한 경복궁
복원계획이 수립된다.
⑬ 경복궁 관리 영역의 변천
해방 이후 경복궁 관리지역은 조선총독부 관저와 청사를 총
무처에서 관할하게 되면서 이 지역이 제외되었다. 문화재의
지정 및 관리 업무를 맡은 문교부는 1960년 경복궁을 고적 제
163호로 지정·고시하면서 중앙청 및 경무대(현 청와대) 지역
을 제외하고 경복궁 영역으로 지정한다. 1962년 1월 20일 문
화재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사적 제117호121)로 재지정 및 고
119) 문화재청, 전게서, p.104, 2007
120) 상동(上同)
121) 지정일은 1962년 1월 20일이다.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95
시하였으나 경복궁 영역은 그대로였다. 따라서 이 당시 경복
궁 측량도나 보수공사 배치도는 중앙청과 청와대 지역이 제외
되어 있다(그림Ⅲ-14,15 참조).
1966년에는 경복궁 외부도로를 정비하기 위한 궁장 이전 공
사가 계획되었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원칙을 들어 민간 가옥을 매수 철거하여 도로를 확장하는 것
을 권고한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의 최종회의에서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이미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도시계획에 의해 지정구역의 최소한의 변경이 가능하다는 결
론을 내리게 되어 1967년 궁장 이전 공사가 진행되었다(그림
16 참조). 이 결정으로 인하여 경복궁 동북쪽 1, 490평이 도
로로 편입되고, 경안당 일부 영역이 소실되게 되어 일제강점
기에 이어 경복궁의 면적은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 1월 1일에 국유재산법이 개정되어 종래 국유재산 소
유권 등기를 기존의 ‘국’에서 ‘국’과 관리청 명칭의 병기
로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 9일에 청와대 구역, 경
복궁 구역, 중앙청 구역, 기타 도로 등의 분할측량이 시행되
어 경복궁 면적이 확정되었다122). 청와대 구역과 중앙청 구
역은 총무처 명의가 기재되었고, 중앙청 구역은 중앙청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로 전용되면서 관리청 명칭이 문
화공보부로 변경되었다.
1973년 9월 경복궁 서북쪽 30경비대대 보안상의 문제로 외
곽지역의 주택들을 철거하고 담장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
었다123). 원래 이 구역은 조선총독부 관사가 위치하던 곳으
로 궁장을 헐어내고 안쪽으로 개축하였는데 후에는 일부 부지
가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던 곳이었다. 이 구역을 경복궁 영역
으로 복원하였지만 원형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1975년 30경비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태원전 지역의 관리 문
제가 대두되어 집옥재 영역을 포함하여 국방부 관할로 넘어가
게 되었다124). 군부대가 이 지역에 주둔하면서 업무용 건물,
숙소, 식당, 운동장, 차량정비시설 등을 건설하여 지형의 변
122) 이 때 결정된 면적은 92,628.2평이다(문화재청, 전게서, p.115,
2007).
123) 면적은 927평 정도이다(문화재청, 전게서, p.115).
124) 면적은 21,781평으로 집옥재(55평), 협길당(42평), 팔우정(9평), 신무
문(28평), 침엽수 171주, 활엽수 549주, 관상수 및 화목류 334주의 관
리가 국방부로 변경되었다(인용:문화재청, 전게서, p.116).
96
화가 심하게 일어났고, 특히 차량정비시설 자리는 기름 오염
때문에 토양오염이 심각하여 30경비대대 철수 후 오염제거작
업이 실시되었다.
그림Ⅲ-19. 1975년 경복궁 현황실측도(인용 :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112, 2007)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97
그림Ⅲ-20. 1987년 경복궁 평면배치도(인용
: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113, 2007)
그림Ⅲ-21. 1967년 경복궁 궁장 이전 공
사 도면(인용 :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
(상), p.114, 2007)
98
고종 당시 전각 규모 1990년대 전각 규모 2009년 복원 후 전각 규모 복원 완료 후의 전각 규모
330여 동
(약 15,600여 평)
36동 존치
(2,957평)
93동 복원
(3,250평)
총 129동 복원
(6,207평, 고종 중건 당시의 40%
)
표 6. 경복궁 기본 궁제 복원 후 건물 면적 비교
(2) 복원계획
1990년대 이후 경복궁은 침전권역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복
원계획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권역별로
중요건물이 복원되었고, 30경비대대가 철수하였으며, 구(舊)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다.
경복궁 복원계획은 단기복원계획과 장기복원계획으로 나누
어지며, 단기복원계획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기본방향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로 복원정비
⋅복원지역은 우선순위에 따라 단계별로 정비
⋅사업순서는 중요 전각, 주축선상의 건물, 외조의 중심
건물 순으로 복구한 다음 외곽지역의 건물들을 순차적 으
로 복구토록 함.
⋅중건 기준연대는 남아있는 건물들이 축조된 시기인 고
종의 경복궁 중건시기인 1865년~1888년을 기준으로 함
∎사업개요
⋅사업기간 : 1990년 ~ 2009년(20개년)
⋅사 업 비 : 1,789억 원
⋅사업대상 : 강녕전 등 93동 3,250평 복원정비
- 1단계 침전 권역(1990~1995) 복원사업: 강녕전 등 12동
794평 복원
- 2단계 동궁 권역(1994~1999) 복원사업 : 자선당 등 18동
352평 복원
- 3단계 흥례문 권역(1996~2001) 복원사업 : 흥례문 등 6
동 517평 복원
- 4단계 태원전 권역(1997~2005) 복원사업 : 태원전 등 25
동 496평 복원
- 5단계 광화문 및 기타 권역(2001~2009) 복원사업 : 광화
문·광화문 월대·좌우 궁장·용성문·영군직소· 수문장
청·군사방 등 32동 1,091평 복원
이렇게 옛 건물들을 복원하게 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99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마련되었다. 문화재 관리방법은
보존에서 활용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작되었고, 1995년 수
문장 교대의식을 시작으로 의례 재현 행사 프로그램이 진행되
었고, 재현전시·문화재 안내원 선발 등 문화재 교육 및 관광
자원 가치를 강조하고,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2004년에는 궁궐 활용에 관한 주제로 공청회125)
까지 열리게 되었고, 고궁의 효율적인 관리운영과 활용방안의
연구용역을 통해 궁궐 행사 재현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장기복원계획은 경복궁의 완전한 복원, 궁 본래의 동선 조
성, 궁 전통 원유의 완전 복구, 현대식 건물 완전 철거를 목
적으로 하고 있다.126) 복원 순서는 궁중생활의 의식생활과
관계되는 건물을 복원하고, 점차로 외곽부의 건물을 중요도에
다라 순차적으로 복원하고, 마지막으로는 미 복원된 궁장과
내부 담을 복원하여 필요한 곳에 조경을 실시하고, 경관을 정
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27).
사업기간은 2006년~2025년까지 20년간 예산을 투입하여 400
여동 9,500평을 정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기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28).
125) 2004년 11월 11일, 문화재청 주최, 제목 : 살아있는 궁궐의 지속가능
한 활용에 관한 공개 공청회
126) 문화재청, 경복궁변천사(상), p.108, 2007
127) 상동(上同)
128) 상동(上同)
100
그림Ⅲ-22. 경복궁 복원계획도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101
2) 공간 구성
(1) 공간 구성 변화
경복궁은 현재 고궁박물관과 민간시설주차장 지역을 포함한
궁장으로 둘러진 지역이 남북 방향으로 878m, 동서 방향으로
520m이며,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다. 면적은 1970년 경계 측량
으로 92,628.2평이 경복궁 경계로 정해졌고, 1973년 서북측
궁장 밖 민가지역 927평이 보안상의 이유로 철거되어 편입되
었으며, 1975년 서북측 30경비대대 주둔지 21,781평이 국방부
소관으로 관할이 바뀌어 71,774평이었던 면적이 경복궁 복원
계획의 제4단계인 태원전 권역(1997~2005) 복원사업으로 30경
비대대가 철수하여 이 지역이 다시 경복궁 영역으로 편입되어
현재 약 9만3천 평에 이르는 매우 넓은 규모이다.
경복궁의 공간 구성은 고종 년간 중건 역사(役事)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북궐도형』에서부터
2006년도 실측 도면까지 총 9단계에 걸친 변화과정을 도면으
로 확인이 가능하다.
『북궐도형(그림Ⅲ-23참조)』에는 경복궁의 후원(後苑)까지
포함된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후원은 경복궁이 창건될 때
에는 없었고, 고종 년간 중건 이후 경계가 정해지고 궁장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공간으로 구획되어 졌다. 후원은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관사 구역으로 이용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는 경무대를 거처 청와대가 들어섰다.
한일 강제 병합 초기(그림Ⅲ-24)에는 전각들의 매각이 본격
화 되어 경복궁의 중요 전각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매각되었
다. 특히 동궁 주변과 북동쪽 궁녀들의 생활공간은 거의가 훼
철되었다. 1915년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에는 동궁
영역과 건춘문 안쪽의 호위시설이 있던 영역에 공진회 전시장
과 서양식 정원이 꾸며지고, 동북쪽 궁녀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영역에는 일본 교또에 독일 기술로 만든 수문시설의 모형을
전시하는 등으로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광화문 안쪽 연지(蓮
池)는 분수가 들어선 원형의 정형식 분수연못으로 변하였고,
그 주변에는 서양식 정원이 꾸며졌다. 이렇게 주요 전각들을
뺀 나머지 공간들은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향원정과 연못, 경
회루 지역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의 관상·산책·휴식 공
간으로 제공되어졌다.
102
사진Ⅲ-1.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경복궁 광화문 안쪽의 전경(인용: 조선총독부, 조선물산공진
회 보고서, 1926)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근정전 전방에 건립된 이후에는
경복궁 전각에 대한 훼철이 더욱 더 심해졌다(그림Ⅲ-26 참
조). 이때에는 강녕전과 교태전, 자경전 등의 주요 전각들이
이전되거나 훼철되고, 특히 경복궁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구역에 위치하던 흥복전 터에 곡수지(曲水池)가 조성
되었다. 후원 구역은 조선총독부 관사지역으로 변모되어, 문
무관 과거시험과 경무장으로 이용되던 융문당·융무당 등의
전각이 헐려나가게 되었다.
1929년 조선박람회장(그림Ⅲ-27)으로 이용될 때의 경복궁은
박람회의 규모가 대규모로 열리게 됨으로서 궁궐 본래의 모습
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형되었다. 향원정과
연못 영역으로까지 전시회장이 들어서고, 외부 공간은 서양식
정원이 조성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중앙청으로 바뀌어 정무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그 외에 일제강점기 때 전시관으로 쓰
이거나 신축된 건물들이 미술관·민속박물관·국립중앙박물
관·조선왕궁역사박물관 등으로 전용되었고, 건추문 안쪽 영
역에는 민간 주차장시설이 조성되게 되었다(그림Ⅲ-28).
1995년에는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
로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교태전이 복원되었다(그림Ⅲ-
29). 1999년에는 동궁 구역이 복원되었고, 차츰차츰 경복궁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하였다(그림Ⅲ-30). 2002년에는 홍례문
권역이 복원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그림Ⅲ-31), 2004년에
는 서북쪽의 태원전 권역과 장고(醬庫)가 복원되었고, 흥복헌
터에 조성되어진 곡수지가 철거되었다(그림Ⅲ-31). 2006년 경
Ⅲ. 궁궐 식재 현황
궁궐 식재 정비방안 연구 - 103
복궁 평면배치에서는 향원정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이 복원되
었다(그림Ⅲ-32),
104
그림Ⅲ-23. 고종 중건 당시의 경복궁 공간구성(『북궐도
형』,1907년 제작 추정)
2010年8月15日日曜日
朝鮮史編集会関係資料2(韓国国史編纂委員会所蔵)
(1)事務書類
▲【中B14-50】委員会議事録 朝鮮史編纂委員会 1冊
【電B14-65】〔朝鮮史編纂委員会第一回議案他書類綴〕 電子複写版 1冊
【B12B-19】朝鮮時代ニ於ケル修史事業梗概(草稿) 朝鮮史編修会 1924年 1冊
▲【中B12B-18】朝鮮史編修会官制関係書類 1925年 1冊
▲【中B14-62】朝鮮史編修会事務報告書 1925年 1冊
【中B14-64】朝鮮史編纂関係書類綴 中枢院 大正12年1月~ 1冊
【中B14-63】朝鮮史編修会領収綴 1冊
【中B14-75】編修打合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昭和5年12月~ 1冊
【B14-74】編修打合会書類綴 朝鮮史編修会 大正15年~ 1冊
【中B13D-1】昭和十三年度秘文書件名簿 朝鮮史編修会 1938年 1冊
▲【中B14-32】秘文書綴 1冊
【B17B-46】史料展覧ニ関スル書類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 1冊
【911.009-繕53標】朝鮮史編纂関係参考書類 朝鮮史編修会 1冊
【911.006-繕53標】委員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昭和3年 1冊
(2)史料採訪復命書・調査書類
▲【B17B-105】平安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14~30年) 3冊
【B17B-9】慶尚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大正12~昭和11年 8冊
▲【B17B-33】東京市史料採訪復命書 1923年 2冊
【B17B-80】済州島・対馬島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大正12年 1冊 *朝鮮史編纂委員会委員:栢原昌三による対馬宗家文書の発見とその調査。
▲【B17B-104】平安南道史料採訪復命書 稲葉岩吉 1923年 1冊
【B17B-6】慶尚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大正12・14年 2冊
▲【B17B-24】内閣文庫朝鮮関係史籍調査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25年 1冊
▲【B17B-101】忠清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25年 1冊
▲【B17B-78】全羅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25~30年) 4冊
【B17B-47】史料調査要項 1926年 1冊
▲【B17B-11】慶尚北道忠清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6~36年) 2冊
▲【B17B-2】江原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1冊
【B17B-45】史料蒐集調査簿 1927年 10冊
▲【B17B-77】全羅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3冊
▲【B17B-102】忠清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3冊
▲【B17B-106】咸鏡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1冊
▲【B17B-114】黄海道・平安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1冊
【B17B-3】京畿道史料採訪復命書 昭和2~5年 5冊 *第1冊未見。
▲【B17B-32】東京・京都・足利・日光・静岡・山口史料採訪復命書 1928年 1冊
▲【B17B-91】支那・平安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8年 1冊
▲【B17B-99】忠清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8~44年) 4冊
▲【B17B-113】黄海道史料採訪復命書 (1928~29年) 2冊
【B17B-10】慶尚北道・忠清南道史料採訪復命書 昭和4年 1冊
▲【B17B-107】咸鏡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9年 1冊
▲【B17B-4】京都市史料採訪復命書 1931年 1冊
▲【B17B-100】忠清南道・全羅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34年 1冊
▲【B17B-7】慶尚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36年 1冊
▲【B17B-92】地方史料借入目録 1937年 1冊
【B17B-31】東京・京都・広島・山口史料採訪復命書 昭和13年 1冊 *朝鮮近代史(明治27年日清戦役から明治43年韓国併合まで)編纂準備のための史料採訪蒐集と実歴談の聴取を開始。
▲【B17B-21】吉林・新京・旅順・大連・奉天史料採訪復命書 1939年 1冊
▲【B16HC-9】北支及中支出張復命書 田保橋潔・田川孝三 1942年 1冊 *朝鮮人の「北支」・「中支」移住、「在支朝鮮人」の民族運動、これに伴う日中間の外交交渉に関する史料調査。
▲【中B17B-84】朝鮮半島史資料調査済書目 1冊
▲【中B17B-85】朝鮮半島史資料調査中書目 1冊
▲【中B17B-87】朝鮮史料調査書目 1冊
▲【B17C-8】鼎足山本朝鮮実録調査書 朝鮮史編修会 6冊
(3)史料複本・目録・参考資料類
【C8A-1】近代陰陽暦対照表(1800~1911) 朝鮮史編修会 原稿 1920年頃 1冊
【B16FB-7】慶尚南道・慶尚北道書院祠宇所在地一覧表 朝鮮史編纂委員会 1925年 1冊
【B13J-77】日鮮関係史料 1925年 56冊 *〈内容〉「塙史料」・「大日本史料」ほかの古文書類(「釜山文書」など)から抄出した謄写本。
【B17B-61】新増東国輿地勝覧引用書目 朝鮮史編修会 1925年 1冊
【C4-10】仏教関係編年史料 朝鮮史編修会 1925年 6冊
【B3C-12】清三朝実録(太祖) 写本 1929年写 8冊
【B3C-13】清三朝実録(太宗) 写本 1929年写 49冊
【中B17B-48】史料採録表 国史編纂委員会〔ママ〕編 筆写本 1930年刊 1冊
【B9C-80】韓山李氏七世行状 写本 1931年写 1冊
【B16AB-3】高麗地名早覧 朝鮮史編修会 1934年 1冊
【B16AB-4】高麗地名誌 朝鮮史編修会 1934年 5冊
【B16FB-11】古城趾名誌 朝鮮史編修会 1934年 3巻3冊
【B16FB-90】朝鮮寺名索引 朝鮮史編修会 1934年 6冊
【B16FB-91】朝鮮寺刹早覧 朝鮮史編修会 9冊
【C15-1】経国鴻猷 写本 1937年写 10冊
【B6B-286】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朝鮮史編修会 1944年 1冊
【B3B-40】憲宗実録採録 朝鮮史編修会 1冊
【B13IB-15】市弊 朝鮮史編修会 1冊
【B17B-14】稿本朝鮮史収載用写真目録 朝鮮史編修会 1冊
【B17B-30】図書借入一覧簿 朝鮮史編修会 1冊
【C8A-26】仁祖朝天変地異事項抄録 朝鮮史編修会 1冊
▲【中B14-50】委員会議事録 朝鮮史編纂委員会 1冊
【電B14-65】〔朝鮮史編纂委員会第一回議案他書類綴〕 電子複写版 1冊
【B12B-19】朝鮮時代ニ於ケル修史事業梗概(草稿) 朝鮮史編修会 1924年 1冊
▲【中B12B-18】朝鮮史編修会官制関係書類 1925年 1冊
▲【中B14-62】朝鮮史編修会事務報告書 1925年 1冊
【中B14-64】朝鮮史編纂関係書類綴 中枢院 大正12年1月~ 1冊
【中B14-63】朝鮮史編修会領収綴 1冊
【中B14-75】編修打合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昭和5年12月~ 1冊
【B14-74】編修打合会書類綴 朝鮮史編修会 大正15年~ 1冊
【中B13D-1】昭和十三年度秘文書件名簿 朝鮮史編修会 1938年 1冊
▲【中B14-32】秘文書綴 1冊
【B17B-46】史料展覧ニ関スル書類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 1冊
【911.009-繕53標】朝鮮史編纂関係参考書類 朝鮮史編修会 1冊
【911.006-繕53標】委員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昭和3年 1冊
(2)史料採訪復命書・調査書類
▲【B17B-105】平安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14~30年) 3冊
【B17B-9】慶尚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大正12~昭和11年 8冊
▲【B17B-33】東京市史料採訪復命書 1923年 2冊
【B17B-80】済州島・対馬島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大正12年 1冊 *朝鮮史編纂委員会委員:栢原昌三による対馬宗家文書の発見とその調査。
▲【B17B-104】平安南道史料採訪復命書 稲葉岩吉 1923年 1冊
【B17B-6】慶尚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大正12・14年 2冊
▲【B17B-24】内閣文庫朝鮮関係史籍調査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25年 1冊
▲【B17B-101】忠清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25年 1冊
▲【B17B-78】全羅北道史料採訪復命書 朝鮮史編修会 (1925~30年) 4冊
【B17B-47】史料調査要項 1926年 1冊
▲【B17B-11】慶尚北道忠清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6~36年) 2冊
▲【B17B-2】江原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1冊
【B17B-45】史料蒐集調査簿 1927年 10冊
▲【B17B-77】全羅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3冊
▲【B17B-102】忠清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3冊
▲【B17B-106】咸鏡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1冊
▲【B17B-114】黄海道・平安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7年 1冊
【B17B-3】京畿道史料採訪復命書 昭和2~5年 5冊 *第1冊未見。
▲【B17B-32】東京・京都・足利・日光・静岡・山口史料採訪復命書 1928年 1冊
▲【B17B-91】支那・平安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8年 1冊
▲【B17B-99】忠清南道史料採訪復命書 (1928~44年) 4冊
▲【B17B-113】黄海道史料採訪復命書 (1928~29年) 2冊
【B17B-10】慶尚北道・忠清南道史料採訪復命書 昭和4年 1冊
▲【B17B-107】咸鏡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29年 1冊
▲【B17B-4】京都市史料採訪復命書 1931年 1冊
▲【B17B-100】忠清南道・全羅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34年 1冊
▲【B17B-7】慶尚南北道史料採訪復命書 1936年 1冊
▲【B17B-92】地方史料借入目録 1937年 1冊
【B17B-31】東京・京都・広島・山口史料採訪復命書 昭和13年 1冊 *朝鮮近代史(明治27年日清戦役から明治43年韓国併合まで)編纂準備のための史料採訪蒐集と実歴談の聴取を開始。
▲【B17B-21】吉林・新京・旅順・大連・奉天史料採訪復命書 1939年 1冊
▲【B16HC-9】北支及中支出張復命書 田保橋潔・田川孝三 1942年 1冊 *朝鮮人の「北支」・「中支」移住、「在支朝鮮人」の民族運動、これに伴う日中間の外交交渉に関する史料調査。
▲【中B17B-84】朝鮮半島史資料調査済書目 1冊
▲【中B17B-85】朝鮮半島史資料調査中書目 1冊
▲【中B17B-87】朝鮮史料調査書目 1冊
▲【B17C-8】鼎足山本朝鮮実録調査書 朝鮮史編修会 6冊
(3)史料複本・目録・参考資料類
【C8A-1】近代陰陽暦対照表(1800~1911) 朝鮮史編修会 原稿 1920年頃 1冊
【B16FB-7】慶尚南道・慶尚北道書院祠宇所在地一覧表 朝鮮史編纂委員会 1925年 1冊
【B13J-77】日鮮関係史料 1925年 56冊 *〈内容〉「塙史料」・「大日本史料」ほかの古文書類(「釜山文書」など)から抄出した謄写本。
【B17B-61】新増東国輿地勝覧引用書目 朝鮮史編修会 1925年 1冊
【C4-10】仏教関係編年史料 朝鮮史編修会 1925年 6冊
【B3C-12】清三朝実録(太祖) 写本 1929年写 8冊
【B3C-13】清三朝実録(太宗) 写本 1929年写 49冊
【中B17B-48】史料採録表 国史編纂委員会〔ママ〕編 筆写本 1930年刊 1冊
【B9C-80】韓山李氏七世行状 写本 1931年写 1冊
【B16AB-3】高麗地名早覧 朝鮮史編修会 1934年 1冊
【B16AB-4】高麗地名誌 朝鮮史編修会 1934年 5冊
【B16FB-11】古城趾名誌 朝鮮史編修会 1934年 3巻3冊
【B16FB-90】朝鮮寺名索引 朝鮮史編修会 1934年 6冊
【B16FB-91】朝鮮寺刹早覧 朝鮮史編修会 9冊
【C15-1】経国鴻猷 写本 1937年写 10冊
【B6B-286】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朝鮮史編修会 1944年 1冊
【B3B-40】憲宗実録採録 朝鮮史編修会 1冊
【B13IB-15】市弊 朝鮮史編修会 1冊
【B17B-14】稿本朝鮮史収載用写真目録 朝鮮史編修会 1冊
【B17B-30】図書借入一覧簿 朝鮮史編修会 1冊
【C8A-26】仁祖朝天変地異事項抄録 朝鮮史編修会 1冊
朝鮮史編集会会議録(韓国国史編纂委員会所蔵)
【電B14-65】〔朝鮮史編纂委員会第一回議案他書類綴〕 1冊
*電子複写版(原本は東京:韓国研究院所蔵)。「朝鮮総督府中枢院」罫紙にペン書き。
《件名目録》
○朝鮮史編纂委員会(第一回)議案 大正12年1月8日
○朝鮮史編纂委員会議事内規
○朝鮮総督府訓令第六十四号 大正11年12月4日 *〈内容〉朝鮮史編纂委員会規程
○第一回朝鮮史編纂委員会会議録 大正12年1月10日 朝鮮史編纂委員会幹事 稲葉岩吉・金東準 *〈内容〉第一日(大正12年1月8日)/第二日(1月9日)/第三日(1月10日)
○朝鮮史編纂ニ付古記録文書等保存ニ関スル件
○道知事会議ニ於ケル朝鮮史料保存ニ関スル協議 大正12年5月19日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順序 大正12年6月12日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協議案
○報告之件 朝鮮総督府及地方官庁所管中ノ史料保存ニ就テ委員会ノ要求ノ件
○朝鮮史編纂ニ付古記録文書等保存ニ関スル件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々議録 大正12年6月12日
○第三回朝鮮史編纂委員会順序
○委員長開会ノ挨拶
○第三回朝鮮史編纂委員会会議録 大正13年4月10日 朝鮮史編纂委員会幹事 稲葉岩吉・金東準 *委員会は大正13年4月2日。
○蒐集史料展覧目録 朝鮮史編纂委員会
○第四回朝鮮史編纂委員会順序 *同文が2部あり。
○第四回朝鮮史編纂委員会会議録 大正13年8月5日
【B12B-19】朝鮮時代ニ於ケル修史事業梗概(草稿) 朝鮮史編修会 1924年 1冊
*〈内容〉一、史官ノ制度/二、史草ノ制/三、実録纂修ノ次第。朝鮮史編修会作製番号:第57号、作製年月日:大正15年3月30日。取扱:図書、記帳57頁。表紙に「朝鮮史編修会図書印」方形朱印を押捺。図書登録番号2639。「朝鮮総督府中枢院」罫紙を使用。
【中B12B-18】朝鮮史編修会官制関係書類 1925年 1冊 *松井氏調書よ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編修会官制
○第2号 朝鮮史編修会官制ニ関スル件
○第3号 朝鮮史編修会官制案
○第4号 朝鮮史編修会ニ関スル電文
○第5号 朝鮮史編修計画書
○第6号 朝鮮史編修会官制案
○第7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修費予定計算書
○第8号 朝鮮史編纂委員会規定
○第9号 朝鮮史編纂委員会職員
○第10号 朝鮮史編修会官制ニ関スル件
○第11号 参考資料目録
○第12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纂費予算案
○第13号 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官制
○第14号 朝鮮史編纂ニ関スル電文
○第15号 朝鮮史編修会官制案
○第16号 臨時帝室編修局設置ノ件
○第17号 臨時編纂部職制
○第18号 史料編纂ニ関スル職員の件
○第19号 維新史料編纂会官制
○第20号 朝鮮半島史□□に関スル件
【中B14-64】朝鮮史編纂関係書類綴 中枢院 大正12年1月~ 1冊
《件名目録》
○第1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第2号 道知事会議日程ニ関スル件
○第3号 古記録文書ニ関スル件
○第4号 朝鮮〔史、脱〕編纂ニ付古記録文書等保存ニ関スル件伺
○第5号 道知事会議協議事項ニ関スル件
○第6号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開会ノ件
○第7号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開会ノ件伺
○第8号 道知事会議ニ於ケル協議
○第9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10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11号 黒板嘱託京城出張ノ件
○第12号 電報案ニ関スル件
○第13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14号 電報案
○第15号 職員出張ノ件
○第16号 電報案
○第17号 図書目録寄贈依頼ノ件回答
○第18号 古記録文書目録返戻ノ件
○第19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20号 第一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件
○第21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22号 出張ニ付依頼ノ件
○第23号 図書送付ノ件
○第24号 画像借入ノ件
○第25号 電報案
○第26号 図書借入ノ件
○第27号 画像借入ノ件
○第28号 図書目録寄贈依頼ノ件
○第29号 礼状
○第30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第31号 礼状
○第32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第33号 出張命令通知ノ件
○第34号 礼状
○第35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36号 寄贈図書領収ノ件
○第37号 礼状 李尚鎬宛
○第38号 古図書目録寄贈ニ関スル件
○第39号 朝鮮要覧登載方依頼ノ件
○第40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利川郡守宛
○第41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江華郡守宛
○第42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沃河、論山、洪城、牙山郡守宛
○第43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清州、忠州、堤川、槐山、公州、大田郡守宛
○第44号 古文書返還ノ件 堤川郡守宛
○第45号 古文書借覧ノ件 堤川郡守宛
○第46号 第二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伺
○第47号 展観会観覧人名簿(大正十四年五月十八、九日)
○第48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伺
○第49号 史料目録印刷ニ関スル件伺
○第50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51号 朝鮮史編纂委員会蒐集史料観覧人名
○第52号 史料展覧会開催
○第53号 朝鮮史資〔ママ〕料展覧会ニ関スル件
○第54号 朝鮮史編纂委員会職員名簿
○第55号 史料寄贈受領ノ件伺
○第56号 礼状 李泰浩宛
○第57号 受取証 李泰浩宛
○第58号 借覧証 李王職(孝宗御筆)
○第59号 額面送付通知ノ件
○第60号 額面伝達方依頼ノ件
○第61号 史料借入謝礼贈与方ノ件
○第62号 吉州郡保管古記録目録送付ノ件
○第63号 写真寄贈領受証(東大文学部)
○第64号 朝鮮史料写真寄贈ニ関スル件伺
○第65号 朝鮮史料写真寄贈ノ件
○第66号 書籍及史料寄贈並ニ謄写方ノ件
○第67号 書籍及史料寄贈並謄写方依頼ノ件
○第68号 書籍及史料寄贈又ハ謄写方依頼ノ件
○第69号 借用証書(総督府博物館)
○第70号 図書借覧証書(李王職)
*他に件名目録に記載が無い書類10点が末尾に綴り込まれている。
【中B14-63】朝鮮史編修会領収綴 1冊
*〈内容〉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宛の出版物(『朝鮮史』・『高麗史節要』)受領証綴。昭和7年6月23日~昭和13年12月11日のもの。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図書登録番号6161。
【中B14-75】編修打合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昭和5年12月~ 1冊
《件名目録》
○第1号 編修打合会開催ノ件 昭和5年12月1日決裁 *〈内容〉昭和5年12月5日に編修打合会を開催する件(朝鮮史第1編〈新羅統一以前〉の編修体裁について)。
○第2号 編修体裁ニ関スル件 *〈内容〉朝鮮史第1編編修体裁(担任主任:今西龍嘱託の提案)について打合会欠席の顧問・委員に意見を求める。黒板勝美ほか4名の回答書を綴り込む。
○第3号 朝鮮史編修会編修打合会議事録 昭和5年12月5日
*以下は末尾に綴り込まれた件名目録に記載が無い書類。
○編修打合会 昭和6年6 月25日 *〈内容〉第6編部に外国関係史料を編入することについて協議。
○編修打合会 昭和10年7月10日 *〈内容〉朝鮮史第4編第4・7巻、第5編第6・7巻、第6編第2・3巻の印刷進行計画について協議。
○朝鮮史進行打合決議書 〔年未詳〕9月30日
【B14-74】編修打合会書類綴 朝鮮史編修会 大正15年~ 1冊
《件名目録》
○第1号 編修打合会ニ関スル回覧
○第2号 朝鮮史編修会編修事務打合会議事録
○第3号 朝鮮史編修会編修事務分担協議会議録
○第4号 第三回編修打合会
○第5号 第四回編修打合会
○第6号 第五回編修打合会
○第7号 中村氏〔中村栄孝〕案朝鮮史編修綱領及ヒ凡例ニ就テノ意見
○第8号 編修打合会ニ関スル件
○第9号 第六回朝鮮史編修打合会
○第10号 第七回編修打合会
○第11号 第八回編修打合会
○第12号 編修会議録
○第13号 編修会議録
○第14号 第九回編修打合会
○第15号 会務打合会
○第16号 第十回編修打合会
○第17号 審議会
○第18号 編修打合会
○第19号 編修打合会開催ノ件
○第20号 編修打合会事項ノ件
【中B13D-1】昭和十三年度秘文書件名簿 朝鮮史編修会 1938年 1冊
*「文書発受件名簿 朝鮮史編修会」用紙を使用。第1号~第37号の件名等を記載。
【B17B-46】史料展覧ニ関スル書類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 1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2号 第一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件
○第3号 〔件名なし〕
○第4号 展観目録配付先(第一回)
○第5号 〔件名なし〕
○第6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伺
○第7号 史料目録印刷ニ関スル件伺
○第8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9号 第二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伺
○第10号 大正十四年五月十八、九日 展覧会観覧人名簿 受付係
○第11号 朝鮮史編纂委員会蒐集史料観覧人名
○第12号 案内状発送先
○第52〔ママ〕号 朝鮮史編纂委員会ノ史料展覧会開催 十八、十九両日中枢院ニ於テ
○第12〔ママ〕号 朝鮮史資〔ママ〕料展覧会ニ関スル件
○第14号 朝鮮史編纂委員会職員名簿
○第15号 展覧会ニ関スル件伺
○第16号 朝鮮史編修会の古地図展覧会
○第16〔ママ〕号 古地図展覧会案内ニ関スル件
○第17号 大正十五年十月五日 一、黒板顧問〔黒板勝美〕ノ紹介ノ大阪市江崎氏ヘ左記図書並ニ古記録応接室ヘ陳列シ展覧ニ供シタリ
○第18号 市村博士来会ノ件
○第8号 朝鮮史料展観目録配付ノ件
○第9号 〔朝鮮史料展観目録受領証〕
○(無番号) 〔朝鮮史編修会委員会欠席通知:3点〕
○(無番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第一案)
史料展覧会案内状ノ件伺(第二案)
史料目録印刷ノ件伺(第三案)
○(無番号) 展覧会案内状発送先
○(無番号) 職員住所一覧表 昭和四年十一月一日現在 法文学部
○(無番号) 〔昭和四年十一月二十九日三十日 展覧会係分担一覧〕
○(無番号) 朝鮮史料展覧会(西小門町 朝鮮史編修会)
○(無番号) 史料展覧ニ関スル件伺
○(無番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第一案)
第二案 史料目録印刷及配付ノ件伺
○(無番号) 昭和七年七月三十一日 朝鮮史料展観目録 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 *原稿
○(無番号) 貴課参観之件 京城師範学校長 渡邊信治
○(無番号) 史料展覧ニ関スル件伺
○(無番号) 史料展観ニ関スル件伺
昭和八年八月十四日 史料展観目録 朝鮮史編修会 *草稿
【911.009-繕53標】朝鮮史編纂関係参考書類 朝鮮史編修会 1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編纂費残額調
○第2号 同
○第3号 史料蒐集費年度内訳
○第4号 編纂費予算
○第5号 大正十三年朝鮮史編纂費見込額
○第6号 大正十三年朝鮮史編纂予算残額調
○第7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纂予算調
○第8号 増加要求額内訳調
○第9号 朝鮮史編纂費俸給調
○第10号 大正十四年度朝鮮総督府特別会計ニ関スル件
○第11号 同
○第12号 朝鮮史編纂費俸給調
○第13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修会経費予算増額申請ノ件
○第14号 予算計画説明書
○第15号 朝鮮史編纂費予算流用ニ関スル件
○第16号 増加要求額内訳調
○第17号 朝鮮史編纂ノ従来ノ成績及将来の年事〔次〕計画
○第18号 増加要求内訳調
○第19号 朝鮮史編纂費予算比較対照表
○第20号 消耗品使用予定調
○第21号 臨時部俸給経理状況
○第22号 予算表
○第23号 朝鮮史編纂費累年予算要求配付額比較表
【911.006-繕53標】委員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昭和3年 1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編修会第一回委員会ノ件
(1)朝鮮史編修会委員会ニ関スル件
(2)第一回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会ノ件伺
(3)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催ニ関スル件
(4)会議出席ニ関スル件
(5)第一回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会並古地図展覧会開催通知ノ件
(6)出席者表
(7)建議案
(8)議案
(9)総督訓示
(10)朝鮮史編修会第一回委員会々議録
(11)第一回委員会附録書類
○第2号 朝鮮史編修会第二回委員会ノ件
(1)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催ニ関スル件
(2)朝鮮史編修会委員会同ノ件
(3)出席者表
(4)朝鮮史編修会第二回委員会関係書類
(5)朝鮮史編修会第二回委員会議事録
○第3号 顧問委員会合ノ件
(1)顧問委員会合ニ関スル件(伺案)
(2)顧問委員会合ノ件(通知案)
(3)採訪史料展観ノ件
(4)訓辞(総督)
(5)挨拶(会長)
(6)出席者表
(7)顧問委員会合議事録
*電子複写版(原本は東京:韓国研究院所蔵)。「朝鮮総督府中枢院」罫紙にペン書き。
《件名目録》
○朝鮮史編纂委員会(第一回)議案 大正12年1月8日
○朝鮮史編纂委員会議事内規
○朝鮮総督府訓令第六十四号 大正11年12月4日 *〈内容〉朝鮮史編纂委員会規程
○第一回朝鮮史編纂委員会会議録 大正12年1月10日 朝鮮史編纂委員会幹事 稲葉岩吉・金東準 *〈内容〉第一日(大正12年1月8日)/第二日(1月9日)/第三日(1月10日)
○朝鮮史編纂ニ付古記録文書等保存ニ関スル件
○道知事会議ニ於ケル朝鮮史料保存ニ関スル協議 大正12年5月19日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順序 大正12年6月12日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協議案
○報告之件 朝鮮総督府及地方官庁所管中ノ史料保存ニ就テ委員会ノ要求ノ件
○朝鮮史編纂ニ付古記録文書等保存ニ関スル件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々議録 大正12年6月12日
○第三回朝鮮史編纂委員会順序
○委員長開会ノ挨拶
○第三回朝鮮史編纂委員会会議録 大正13年4月10日 朝鮮史編纂委員会幹事 稲葉岩吉・金東準 *委員会は大正13年4月2日。
○蒐集史料展覧目録 朝鮮史編纂委員会
○第四回朝鮮史編纂委員会順序 *同文が2部あり。
○第四回朝鮮史編纂委員会会議録 大正13年8月5日
【B12B-19】朝鮮時代ニ於ケル修史事業梗概(草稿) 朝鮮史編修会 1924年 1冊
*〈内容〉一、史官ノ制度/二、史草ノ制/三、実録纂修ノ次第。朝鮮史編修会作製番号:第57号、作製年月日:大正15年3月30日。取扱:図書、記帳57頁。表紙に「朝鮮史編修会図書印」方形朱印を押捺。図書登録番号2639。「朝鮮総督府中枢院」罫紙を使用。
【中B12B-18】朝鮮史編修会官制関係書類 1925年 1冊 *松井氏調書よ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編修会官制
○第2号 朝鮮史編修会官制ニ関スル件
○第3号 朝鮮史編修会官制案
○第4号 朝鮮史編修会ニ関スル電文
○第5号 朝鮮史編修計画書
○第6号 朝鮮史編修会官制案
○第7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修費予定計算書
○第8号 朝鮮史編纂委員会規定
○第9号 朝鮮史編纂委員会職員
○第10号 朝鮮史編修会官制ニ関スル件
○第11号 参考資料目録
○第12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纂費予算案
○第13号 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官制
○第14号 朝鮮史編纂ニ関スル電文
○第15号 朝鮮史編修会官制案
○第16号 臨時帝室編修局設置ノ件
○第17号 臨時編纂部職制
○第18号 史料編纂ニ関スル職員の件
○第19号 維新史料編纂会官制
○第20号 朝鮮半島史□□に関スル件
【中B14-64】朝鮮史編纂関係書類綴 中枢院 大正12年1月~ 1冊
《件名目録》
○第1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第2号 道知事会議日程ニ関スル件
○第3号 古記録文書ニ関スル件
○第4号 朝鮮〔史、脱〕編纂ニ付古記録文書等保存ニ関スル件伺
○第5号 道知事会議協議事項ニ関スル件
○第6号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開会ノ件
○第7号 第二回朝鮮史編纂委員会開会ノ件伺
○第8号 道知事会議ニ於ケル協議
○第9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10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11号 黒板嘱託京城出張ノ件
○第12号 電報案ニ関スル件
○第13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14号 電報案
○第15号 職員出張ノ件
○第16号 電報案
○第17号 図書目録寄贈依頼ノ件回答
○第18号 古記録文書目録返戻ノ件
○第19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20号 第一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件
○第21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22号 出張ニ付依頼ノ件
○第23号 図書送付ノ件
○第24号 画像借入ノ件
○第25号 電報案
○第26号 図書借入ノ件
○第27号 画像借入ノ件
○第28号 図書目録寄贈依頼ノ件
○第29号 礼状
○第30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第31号 礼状
○第32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第33号 出張命令通知ノ件
○第34号 礼状
○第35号 職員出張ニ関スル件
○第36号 寄贈図書領収ノ件
○第37号 礼状 李尚鎬宛
○第38号 古図書目録寄贈ニ関スル件
○第39号 朝鮮要覧登載方依頼ノ件
○第40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利川郡守宛
○第41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江華郡守宛
○第42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沃河、論山、洪城、牙山郡守宛
○第43号 職員出張ニ付依頼ノ件 清州、忠州、堤川、槐山、公州、大田郡守宛
○第44号 古文書返還ノ件 堤川郡守宛
○第45号 古文書借覧ノ件 堤川郡守宛
○第46号 第二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伺
○第47号 展観会観覧人名簿(大正十四年五月十八、九日)
○第48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伺
○第49号 史料目録印刷ニ関スル件伺
○第50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51号 朝鮮史編纂委員会蒐集史料観覧人名
○第52号 史料展覧会開催
○第53号 朝鮮史資〔ママ〕料展覧会ニ関スル件
○第54号 朝鮮史編纂委員会職員名簿
○第55号 史料寄贈受領ノ件伺
○第56号 礼状 李泰浩宛
○第57号 受取証 李泰浩宛
○第58号 借覧証 李王職(孝宗御筆)
○第59号 額面送付通知ノ件
○第60号 額面伝達方依頼ノ件
○第61号 史料借入謝礼贈与方ノ件
○第62号 吉州郡保管古記録目録送付ノ件
○第63号 写真寄贈領受証(東大文学部)
○第64号 朝鮮史料写真寄贈ニ関スル件伺
○第65号 朝鮮史料写真寄贈ノ件
○第66号 書籍及史料寄贈並ニ謄写方ノ件
○第67号 書籍及史料寄贈並謄写方依頼ノ件
○第68号 書籍及史料寄贈又ハ謄写方依頼ノ件
○第69号 借用証書(総督府博物館)
○第70号 図書借覧証書(李王職)
*他に件名目録に記載が無い書類10点が末尾に綴り込まれている。
【中B14-63】朝鮮史編修会領収綴 1冊
*〈内容〉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宛の出版物(『朝鮮史』・『高麗史節要』)受領証綴。昭和7年6月23日~昭和13年12月11日のもの。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図書登録番号6161。
【中B14-75】編修打合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昭和5年12月~ 1冊
《件名目録》
○第1号 編修打合会開催ノ件 昭和5年12月1日決裁 *〈内容〉昭和5年12月5日に編修打合会を開催する件(朝鮮史第1編〈新羅統一以前〉の編修体裁について)。
○第2号 編修体裁ニ関スル件 *〈内容〉朝鮮史第1編編修体裁(担任主任:今西龍嘱託の提案)について打合会欠席の顧問・委員に意見を求める。黒板勝美ほか4名の回答書を綴り込む。
○第3号 朝鮮史編修会編修打合会議事録 昭和5年12月5日
*以下は末尾に綴り込まれた件名目録に記載が無い書類。
○編修打合会 昭和6年6 月25日 *〈内容〉第6編部に外国関係史料を編入することについて協議。
○編修打合会 昭和10年7月10日 *〈内容〉朝鮮史第4編第4・7巻、第5編第6・7巻、第6編第2・3巻の印刷進行計画について協議。
○朝鮮史進行打合決議書 〔年未詳〕9月30日
【B14-74】編修打合会書類綴 朝鮮史編修会 大正15年~ 1冊
《件名目録》
○第1号 編修打合会ニ関スル回覧
○第2号 朝鮮史編修会編修事務打合会議事録
○第3号 朝鮮史編修会編修事務分担協議会議録
○第4号 第三回編修打合会
○第5号 第四回編修打合会
○第6号 第五回編修打合会
○第7号 中村氏〔中村栄孝〕案朝鮮史編修綱領及ヒ凡例ニ就テノ意見
○第8号 編修打合会ニ関スル件
○第9号 第六回朝鮮史編修打合会
○第10号 第七回編修打合会
○第11号 第八回編修打合会
○第12号 編修会議録
○第13号 編修会議録
○第14号 第九回編修打合会
○第15号 会務打合会
○第16号 第十回編修打合会
○第17号 審議会
○第18号 編修打合会
○第19号 編修打合会開催ノ件
○第20号 編修打合会事項ノ件
【中B13D-1】昭和十三年度秘文書件名簿 朝鮮史編修会 1938年 1冊
*「文書発受件名簿 朝鮮史編修会」用紙を使用。第1号~第37号の件名等を記載。
【B17B-46】史料展覧ニ関スル書類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 1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2号 第一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件
○第3号 〔件名なし〕
○第4号 展観目録配付先(第一回)
○第5号 〔件名なし〕
○第6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伺
○第7号 史料目録印刷ニ関スル件伺
○第8号 朝鮮史料展覧案内ニ関スル件伺
○第9号 第二回史料展観目録配付ノ伺
○第10号 大正十四年五月十八、九日 展覧会観覧人名簿 受付係
○第11号 朝鮮史編纂委員会蒐集史料観覧人名
○第12号 案内状発送先
○第52〔ママ〕号 朝鮮史編纂委員会ノ史料展覧会開催 十八、十九両日中枢院ニ於テ
○第12〔ママ〕号 朝鮮史資〔ママ〕料展覧会ニ関スル件
○第14号 朝鮮史編纂委員会職員名簿
○第15号 展覧会ニ関スル件伺
○第16号 朝鮮史編修会の古地図展覧会
○第16〔ママ〕号 古地図展覧会案内ニ関スル件
○第17号 大正十五年十月五日 一、黒板顧問〔黒板勝美〕ノ紹介ノ大阪市江崎氏ヘ左記図書並ニ古記録応接室ヘ陳列シ展覧ニ供シタリ
○第18号 市村博士来会ノ件
○第8号 朝鮮史料展観目録配付ノ件
○第9号 〔朝鮮史料展観目録受領証〕
○(無番号) 〔朝鮮史編修会委員会欠席通知:3点〕
○(無番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第一案)
史料展覧会案内状ノ件伺(第二案)
史料目録印刷ノ件伺(第三案)
○(無番号) 展覧会案内状発送先
○(無番号) 職員住所一覧表 昭和四年十一月一日現在 法文学部
○(無番号) 〔昭和四年十一月二十九日三十日 展覧会係分担一覧〕
○(無番号) 朝鮮史料展覧会(西小門町 朝鮮史編修会)
○(無番号) 史料展覧ニ関スル件伺
○(無番号) 史料展覧会開催ノ件(第一案)
第二案 史料目録印刷及配付ノ件伺
○(無番号) 昭和七年七月三十一日 朝鮮史料展観目録 朝鮮総督府朝鮮史編修会 *原稿
○(無番号) 貴課参観之件 京城師範学校長 渡邊信治
○(無番号) 史料展覧ニ関スル件伺
○(無番号) 史料展観ニ関スル件伺
昭和八年八月十四日 史料展観目録 朝鮮史編修会 *草稿
【911.009-繕53標】朝鮮史編纂関係参考書類 朝鮮史編修会 1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編纂費残額調
○第2号 同
○第3号 史料蒐集費年度内訳
○第4号 編纂費予算
○第5号 大正十三年朝鮮史編纂費見込額
○第6号 大正十三年朝鮮史編纂予算残額調
○第7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纂予算調
○第8号 増加要求額内訳調
○第9号 朝鮮史編纂費俸給調
○第10号 大正十四年度朝鮮総督府特別会計ニ関スル件
○第11号 同
○第12号 朝鮮史編纂費俸給調
○第13号 大正十四年度朝鮮史編修会経費予算増額申請ノ件
○第14号 予算計画説明書
○第15号 朝鮮史編纂費予算流用ニ関スル件
○第16号 増加要求額内訳調
○第17号 朝鮮史編纂ノ従来ノ成績及将来の年事〔次〕計画
○第18号 増加要求内訳調
○第19号 朝鮮史編纂費予算比較対照表
○第20号 消耗品使用予定調
○第21号 臨時部俸給経理状況
○第22号 予算表
○第23号 朝鮮史編纂費累年予算要求配付額比較表
【911.006-繕53標】委員会議事録 朝鮮史編修会 大正14年~昭和3年 1冊
《件名目録》
○第1号 朝鮮史編修会第一回委員会ノ件
(1)朝鮮史編修会委員会ニ関スル件
(2)第一回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会ノ件伺
(3)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催ニ関スル件
(4)会議出席ニ関スル件
(5)第一回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会並古地図展覧会開催通知ノ件
(6)出席者表
(7)建議案
(8)議案
(9)総督訓示
(10)朝鮮史編修会第一回委員会々議録
(11)第一回委員会附録書類
○第2号 朝鮮史編修会第二回委員会ノ件
(1)朝鮮史編修会委員会開催ニ関スル件
(2)朝鮮史編修会委員会同ノ件
(3)出席者表
(4)朝鮮史編修会第二回委員会関係書類
(5)朝鮮史編修会第二回委員会議事録
○第3号 顧問委員会合ノ件
(1)顧問委員会合ニ関スル件(伺案)
(2)顧問委員会合ノ件(通知案)
(3)採訪史料展観ノ件
(4)訓辞(総督)
(5)挨拶(会長)
(6)出席者表
(7)顧問委員会合議事録
2010年8月14日土曜日
和館と呼称しない日本人
「倭」が良い意味を帯びているのかどうか、を知らない研究者が存在すると思われない。
ところが慶応大学の田代和生著『倭館』に代表されるように、日本では「和館」ではなく「倭館」が一般的に通用している。韓国で通称するから、という理由である。しかしこれで、韓国の研究者に迎合する立場は明確になったとしても、日本人の立場は担保されるだろうか。
新書: 268ページ
出版社: 文藝春秋 (2002/10)
ISBN-10: 4166602810
ISBN-13: 978-4166602810
発売日: 2002/10
これまで、韓国研究者の甘心を買うような態度を取ることが一般的であった。
もう、こうした愚かな態度は止めようではないか。
すでに早くから泉澄一先生の著書には、一貫して「和館」と表記されていた。慧眼の士である。
ところが慶応大学の田代和生著『倭館』に代表されるように、日本では「和館」ではなく「倭館」が一般的に通用している。韓国で通称するから、という理由である。しかしこれで、韓国の研究者に迎合する立場は明確になったとしても、日本人の立場は担保されるだろうか。
新書: 268ページ
出版社: 文藝春秋 (2002/10)
ISBN-10: 4166602810
ISBN-13: 978-4166602810
発売日: 2002/10
これまで、韓国研究者の甘心を買うような態度を取ることが一般的であった。
もう、こうした愚かな態度は止めようではないか。
すでに早くから泉澄一先生の著書には、一貫して「和館」と表記されていた。慧眼の士である。
2010年8月3日火曜日
世界韓国研究コンソーシアム第6回韓国学ワークショップ延世大学大会開催
世界韓国研究コンソーシアム 国際韓国学ワークショップ開催
日時:2010年6月29日(火)9:30~7月2日(金)13:00
場所:韓国 延世大学校 Oesol Hall#110
プログラムなどの詳細は、延世大学校国学院HP「제6차 국제한국학워크숍 」でご確認ください。
http://kukhak.yonsei.ac.kr/Front_kor/05_information/01_Notice_View.asp
日時:2010年6月29日(火)9:30~7月2日(金)13:00
場所:韓国 延世大学校 Oesol Hall#110
プログラムなどの詳細は、延世大学校国学院HP「제6차 국제한국학워크숍 」でご確認ください。
http://kukhak.yonsei.ac.kr/Front_kor/05_information/01_Notice_View.asp
福岡市内教員対象「韓国理解」ワークショップ 開催2010年度
福岡市内教員対象「韓国理解」ワークショップ 開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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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程:平成22年7月26日(月)-29日(木)
場所:九州大学 韓国研究センター(箱崎キャンパス)、
九州大学 システム生命科学府 2階
大韓民国釜山広域市(7月28-29日)
開催目的:
本ワークショップは、韓国研究の第一線で活躍する専門家による講義を通して韓国に対する理解を深めるとともに、実際に釜山を訪問し、福岡・釜山共同副教材である「もっと知りたい福岡・釜山(더 알고 싶은 부산-후쿠오카)」(小学校6年生用)を使用する釜山側の先生方との意見交換の場を持つことで、今後の国際(韓国)理解教育、カリキュラム作成、学習指導など、幅広い分野におけるスキルアップを図ることを目的とする。
後援:福岡市教育委員会
助成:韓国国際交流財団
本事業は、2010年度から3年計画で実施する予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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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程:平成22年7月26日(月)-29日(木)
場所:九州大学 韓国研究センター(箱崎キャンパス)、
九州大学 システム生命科学府 2階
大韓民国釜山広域市(7月28-29日)
開催目的:
本ワークショップは、韓国研究の第一線で活躍する専門家による講義を通して韓国に対する理解を深めるとともに、実際に釜山を訪問し、福岡・釜山共同副教材である「もっと知りたい福岡・釜山(더 알고 싶은 부산-후쿠오카)」(小学校6年生用)を使用する釜山側の先生方との意見交換の場を持つことで、今後の国際(韓国)理解教育、カリキュラム作成、学習指導など、幅広い分野におけるスキルアップを図ることを目的とする。
後援:福岡市教育委員会
助成:韓国国際交流財団
本事業は、2010年度から3年計画で実施する予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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