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年12月26日土曜日

東アジア共同体の可能性

「동아시아 문화공동체」의 가능성
-문화하이브리드(Cultural Hybrid)화론의 관점에서-

일본구주대학교한국연구센터 교수 松原孝俊

- 목 차 -

1. 문제제기와 논점
2. 모자이크상태의 한국 문화
3. 한국 정부에 의한 문화 정책의 동향:「새마을 운동」•「지역 축제」•「한국문화의 세계화」
4. McDonald 화현상을 띠고 있는 한일 문화
5. 하이브리드(Hybrid)화하는 한일 문화
6. 나가면서


1. 문제제기와 논점

(1-1)본고의 목적은 비교 문화론의 관점에서, 주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문화의 동향을 논함으로서, 한일양국을 기축으로 전개되리라 예상되는「동아시아 문화 공동체」구축을 위해 새로운 동아시아 문화모델을 작업가설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단지, 지면 관계상, 본고의 고찰대상은 한국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본고의 주장을 보다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21 세기의 동아시아는 테러의 위협, 조류독감의 대유행, 석유가격의 상승, 지진이나 해일등의 자연재해등 많은 과제에 직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여 다문화가 공존하는 「문화 하이브리드(Cultural Hybrid)」의 시대에 돌입함으로서 가까운 미래에 「문화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라고 예고해 두고 싶다. 이러한 예상을 고려하였을때, 근대 한국사회가 경험하는 문화적 이행을 도식적으로 나타내 보면 「국민 문화 육성→전통•국민 문화 보호→외래 문화의 규제→전통 문화의 Big bang→외래문화의 규제완화→다문화와의 경쟁→다문화와의 공생→문화 하이브리드(Cultural Hybrid)」가 될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트랜스내셔널리즘의 진행으로 인한 하이브리디티(Hybridity:異種混淆性)의 문화」가 형성될 사회적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1-2)따라서 어떤 한국산의 생활문화상품, 영화, 드라마, K-Pop, 만화, 애니메이션등이 만들어 지면, 그것은 서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아시아 문화마켓에 나오게 된다. 상품은 품질의 우수성과 흥미유발이 인정되면 살아 남지만, 불량품으로 판정을 받거나 흥미유발에 실패를 하면 도태 되고 만다.
(1-3)또한 무역, 투자, 금융등의 경제면을 포함하여, 국제테러리즘, 지진등의 비전통적 안전보장의 분야에 있어도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협력과 연대는 시급한 관건이 되고 있다. 조류독감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가 될것이다. 이렇게 상호의존의 협력관계가 중요시되고 있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2003년의 한중일삼국의 연간 무역액이 약 2,211억 달러(미국•일본간은 약 1,740억 달러), 인적왕래는 약 797만명(미국•일본간은 약 470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벌써「동아시아 경제통합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경제통합이라는 것은 어떤 제도적장치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둔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한중일3개국은 국민국가의 경계가 무너지거나 약해져 동아시아삼국이 「융합」을 하여 하나의 국가연합체로 진행할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미지는 동아시아삼국의 이상적인 형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참배문제에서 상징적으로 거론되는 전쟁책임에 관한 인식의 차이나 역사 인식 문제, 영유권 문제, 가스전개발 문제등의 에너지 자원 획득 경쟁을 둘러싼 현실을 응시하면, 한중일 3개국이 구성하는 지역연합체의 달성은 용이하게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의 매스컴들에 주목해 보면, 주로 일본이「동아시아 지역 연합체」결성의 움직임에 찬물을 끼언고 있는것 같이 보도를 하고 있다. 굳이 필자가 강조할 것도 없이 EU를 모델로 한「동아시아 공동체」형성의 전도가 밝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경제와 문화에 있어서의 동아시아의 지역통합이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것을 기대하면서, 이를 위한 방책을 모색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1-4)여기서 우리는 논의의 전제로서「사람, 물건, 돈, 정보, 기술」이 교차하는 보더레스(Borderlessness)시대의 도래, 글로벌사회(Globalization)의 진전, Internet등의 IT기술의 발달, 미디어의 발전, 관광(Tourism)등에 의한 사람의 이동 확대로 인해, 「한국 문화」또는 「일본 문화 」라고 하는 종래의 국가를 경계선으로서 문화를 논하는 분석틀을 적용할 수 없는 현실인식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의미에서 덧붙이자면, 본고의 목적은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기능/제도적 통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화 비교론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인식(주로 문화) 통합」을 논의하는 것임을 말해둔다.
(1-5)먼저,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한국문화에 대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싶다.
①2004년 현재,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의 중요 7 대도시의 인구는 전국인구의 47%를 넘고 있다(1967년의 비율은, 17. 4%). 이러한 경이적인 도시 집중율을 보이며 선진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조선왕조시대에 크게 비중을 둔「전통적 문화양식」으로 한국문화를 설명해 온 종래의 인식방법은 과연 유효할까?

<표1>2004년현재, 한국중요7대도시의 인구비율
년도 전국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비율
2004 49,052,988 10,287,847 3,684,153 2,539,738 2,610,715 1,406,915 1,450,750 1,087,958 47%
                           <2005년도한국통계청자료>
②인터넷보급율 61%(2004년 현재), 휴대전화 가입자수 3,834만명(2005년 12월현재)의 시대에 돌입한 IT사회의 도래는 한국문화를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

③아직까지 한국문화를 설명하는 개념은, 95%이상의 인구가 농•어업 등에 종사하고 있던 100년이전의 사회를 기준으로 설정된 민속모델이 그 유효성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율 99. 9%, 고교 진학율 99. 7%, 2년제전문대학 이상의 진학율 80. 7%, 대학생 총수 1,859,639명<2005년도 한국 통계청발표재적학생수>로 고학력/탈농경 사회로 전환된 지금, 과연 전시대적인 민속모델을 답습해야 할 것인가?
④더구나 한국민속력은 이미 농경력에서 샐러리력(일요일이나 휴일중심의 행사)이나 관광력(관광 행사에 합치한 일정이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종래의 민속모델은 과연 한국사회의 이러한 현재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⑤21 세기의 동아시아 시장경제를 고려했을 때, 한국•일본•중국의 다국적기업(삼성, 소니, 알- 등)의 활동들이 보여주듯이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경제시장은 벌써 통합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경제적인 금융통합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국가적 경계를 넘는 제도적 통합을 위한 길이 닫혀있는 모순된 사회적 상황 속에서, 동아시아 3국의 생활문화상품은 어떻한 형태로 개발/수출되며, 또 어떠한 형태로 공유될것인가?
(1-6)마지막으로 필자의 이론적인 근거를 밝혀두고자 한다. 이론적인 근거로서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이 제시해 온 「Acculturation」이론과 「Race Prejudice」이론, 그리고 「Liner model」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들 이론이 제시해 온 diffusion→selection→Acceptance→Adjustment→Adaptation→Integration→Reaction/Contra-acculturative movement이나, Contact→Competition→Conflict→Adjustment→
Assimilation, 그리고 reaffirmation→synthesis→withdrawal→biculturalism→Construc
tive marginality→Compensatory adaptation→Interpretation 등의 도식은 필자에 있어서 매우 매력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 있는 백인 우월 주의나 미국 사회에 있어서의 백인화(marginal man / The Uprooted/Double Conscious
ness/Lost between two cultures)전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논리를 동아시아 문화에 그대로 적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단지 「Biculturalism」이론을 도입하는 필자의 의도는 문화 이해를 위한 「Switch mechanism」이 중요성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2. 모자이크상태의 한국문화

(2-1) 필자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72년이었다. 당시 방문의 목적은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가 아닌 가능한한 많은 촌락을 돌면서 본격적인 촌락조사를 행하기 위한 사전조사(Pilot survey)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전 善生永助와 같은 민속학적 선구자들이 제시한 전형적인 한국의 전통촌락을 찾아 다녔다.
그 당시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조사의 항목은 한국민속학적 텍스트에서 논의되어 오던 「마을의 역사, 마을의 배치구조, 방언, 인간관계, 집(가족)의 구성, 문중조직, 선조제사, 민간신앙과 의례, 농업과 노동교환(품앗시), 계등의 상호부조, 농기구, 식기등과 같은 물질문화, 년중행사, 동제, 식민지기의 기억, 새마을 운동, 구비전승, 샤마니즘, 풍수사상, 족보등」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식문화나 아동문화, 대중문화등에 대해서는 필자의 관심밖의 사항이었음을 고백한다.
당시 일본내에서는 한국에 관한 정치적 정보(북한은 천국, 남한은 지옥과 같은)는 팽대해 있었지만, 사회문화적인 구체적인 상황을 알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으며, 한국내에서 현지조사를 한 연구자 물론 보고서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 이유로서는 먼저 당시 일본인이 한국정부로 부터 입국비자를 받아낸다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더구나 1945년부터 단절된 양국의 왕래가 젊은 한국연구자를 육성하는데 장해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 일본국내의 한국연구자들이 1945년이후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인 구체상을 접하게 되는 것은 1973년이었다.
사실 일본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한국연구가 재개되는 것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의 일이고, 따라서 당시 한국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 20년의 공백을 1945년이전 보고서로서 메꿀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경성제국대학에 근무하면서 한반도를 조사한 秋葉隆(1954) 나 鈴木栄太郎(1944) 등과 같은 연구자의 보고서, 또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조사보고서등을 참고로 하여 한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학자 秋葉隆가 영국식의 dualistic structure에 주목하여 제시한 민속도식인,

남 – 유교 – 마을제사
여 – 무속 – 집제사

이라는 분석결과는 많은 한국연구자들에게 한국을 이해하는 전형이 되었으며, 그러한 연구자들 중에 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키바교수가 한반도 분석에 사용한 키워드는 「양반, 유교, 무당( Shamanism)」이었다. 당시 필자도 아키바의 영향을 받아, 「양반」이 사는 마을을 찾아서 「양반집」을 방문하고, 그리고 「양반]」과 인터뷰를 하며 「양반」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해명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양반」을 안다는 것은 한국을 안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회유씨라든가 월성손씨등,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양반적 전통이 강한 「반촌」(善生栄助에 의해 명명)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하면 간단히 한국사회 내지는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으로 당시 필자가 조사를 행한것이 양반의 전유물라고 여겨지던 족보였다. 당시 발표한 필자의 작업가설은 이하와 같은 것이었다.

족보란 시조와 출자를 같이한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부계출자라는 선택적인 기준에 부합되는 자만을 계보적으로 질서화하여 기록한 것으로, 선조제사를 의무화함과 동시에 동족의 우월성과 영속성을 주장할 수있는 근거로 삼아, 동족의 통함을 각성/강화하는 미디어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 양반만이 기록할 수 있는 책자임에 따라 그 사회적 지위를 내외에 인식시키는 심볼이기도 하다.(158)

그런데, 직면한 문제는 필자가 한국연구를 시작하게 되면서 가지게 된 「양반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화두 자체를 재고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곤란하게도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벌써 「반촌」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속에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양반이 누구인지, 어디에 가면 양반을 만날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서 양반을 택하고, 또 양반의 정의를 통해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양반을 찾아 마을을 방문하던 필자로서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너무나 기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2-2)그동안 유교적 전통을 지키는 상징적인 사고였던 「동성동본혼의 금지규정」(민법809조) 조차도 현실에 맞지않는 다는 이유로 1997년7월31일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음으로서 실재혼관계에 있는 남녀의 혼인신고를 받아들였다 . 그리고 1999년1월 한국정부는 8촌이내의 관계가 아니라면 부부로서의 법적지위와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서 족보에서 명확히 규정해 온 부계혈연집단의 유지는 커다란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2005년 3월2일 한국국회는 「호주제도의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일부개정법률안」을 가결하였고, 부계혈연집단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있다. 이 법률개정에 이르게 된 과정에는 2005년2월3일 「호주제헌법불합치」라는 대법원의 위헌판결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판결문에서는 「호주제는 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서 호주를 계승하는 순위나 혼인할때 신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정당한 이유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임으로 헌법에 규정된 남녀평등과 개인의 존엄성에 위배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2-3) 또한 이미 크리스트교 신자가 전국민의 50%를 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샤머니즘은 영원히 한국민속의 근간이며 대표선수로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2-4) 하물며 한국에 있어서의 인터넷이나 위성TV, 휴대전화의 폭발적 보급은 국경을 넘어 세계 각지의 커뮤니티를 연결시키고 있고, 이미 이러한 새로운 정보와 커뮤니케이션•테크놀로지는 한국문화의 성격 자체를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해야 할것이다. 문화자체가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수출되거나 혹은 트랜스내셔널적인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다문화의 대중 소비 현상을 맞이하여 한국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2-5) 이와 같이, 1970년대 이후 불과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속에서 한국은「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워 지는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며,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 핵가족화 문제, 북미에의 이민, 국제통화위기, 해외여행의 대중화, 소자화 문제를 발생시켰고, 인터넷등에 의한 IT혁명의 길을 걷어 왔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그 동안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인식되어 온 「양반/유교/무당(무속)」등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거의 그 유효성을 상실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6)이제 한국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한국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필요로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한국문화를 논할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문화를 논하는데 있어서도 똑같은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국경을 초월하는 「트랜스내셔널적인 문화동향」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 보다 현실적인 한국을 논하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자세는 이제까지 민속학적 연구가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모자이크적인 문화현상 그 자체에 착목할 필요가 있다.

3. 한국정부에 의한 문화정책의 동향:「새마을 운동」・「지역축제」・「한국문화의 세계화」

(3-1) 먼저 본고에서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즉 20 세기 후반 한국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하여 한국정부가 행한 문화정책의 분석을 통해 제시해 둔다. 단지, 지면 관계상 모든 문화 정책을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본고에서는 1970년대의「새마을 운동」(Local 문화의 변용과 전환점)과 1980년대의「지역 축제」(Local 문화의 창조)정책을 중심으로 설명을 할 것이다. 만약을 위해 덧붙이자면, 1945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시기, 즉 주로 이승만대통령 시대에 있어서의 반일/반공 문화 정책 등에 대해서는 본고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3-2)첫번째로 1970년대부터 전국적인 사회개혁운동으로 행해진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설명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1961년 7월 박정희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에 취임할 당시(1962년 12월 신헌법공포<제3공화제>, 1963년 10월 민정이양, 대통령선거에서 제5대대통령으로 취임), 한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 보다 낮은 수치였다.

<표2> 일인당 국민소득 단위:달러
日本 韓国 北韓 Philippine
1958 320 121 190 198
1960 760 120 330 150
1965 1920 250 450 210
1970 4450 580 380
1980 9020 1450 710

경제학분야에서 자주 이야기 되고 있듯이, 한국의 경제 발전은 1965년이후에 시작된다. 이 1965년의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서는 한국이 베트남에 참전을 하고 한일 평화조약이 체결된 해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대통령취임후, 1962년 경제5개년 계획의 실시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듯이, 빈곤의 극복, 경제재건에 전력을 투구하고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에서, 공무원부패추방등을 통한 근대화정책에 착수함으로서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꾀하였다. 하지만 역시 한국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역사적사건은 1970년 4월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농촌재건운동의 일환으로서 구상된 「새마을 운동」이다. 그 당시 전국의 거의 모든 농촌은 소작제도의 잔존, 농업규모의 영세성, 많은 실업자의 존재등,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대통령령으로 실시된 새마을 운동은 한국경제사회의 기간산업으로서 농업과 어업이 차세대에 계승될 수 있도록 농업의 체질개선을 추진하고, 효과적이며 안정적인 농업경영을 행함으로서 산업발전의 기초조건을 정비하려는 목적으로 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자립, 근면, 협동」을 슬로건으로 하여, 전국적인 규모로서 행해진 이 운동은 관이 주도하여,
1)소득격차의 해소와 농어업경영소득안정
2)근대화정신의 계발과 정착
3)농어촌의 생활환경개선, 도로등의 정비를 목표로 하여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이 국가적인 프로젝트는 농촌개발의 성공예로서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덧붙여서 2005년10월 중국정부는 11차경제개발5개년계획(2006년-2010년)속에 「신농촌운동」의 추진을 포함시켰다. 이것은 새마을 운동을 중국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중앙일보 2006년2월14일).
(3-3)필자가 보고 들은 1970년대초 경상북도일대의 농촌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을내의 도로가 개량/보수되고, 초가지붕이 기와/슬레트지붕으로 바뀌고, 새마을 창고의 건설을 위한 작업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마을내의 의식개혁운동이 전개되어, 전근대적 정신이라는 명목으로 「미신」으로부터의 탈피라든가, 무당추방운동등도 실시되고 있었다.
고수입형산업의 전개을 꾀하기 위하여 기계화의 촉진, 신품종/신재배법/신규작물의 도입이나 농지관개시설의 정비, 작업의 능률화/쾌적화등에 의한 고품질/고효율의 생산체계의 확립등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농촌의 많은 부분이 크게 변모하였고,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수도작중심의 생활曆이 변화하여, 사람들의 재래적인 생활형태는 급속히 파괴되고 있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변의 농가들은 우선적으로 저금리의 주택융자를 받을 수가 있었던 덕분에, 다양한 색체로서 도시풍의 현대주택으로 변모되었고, 이는 한국을 찾는 외국관광객을 놀라게 하였다. 그 전형적인 예로서, 많은 관광객이 통과하는 경부고속도로 경주인터체인지 부근에 계획적으로 건축된 시멘트로 만든 전통적인 한옥풍가옥을 들수 있다.
(3-4) 한편, 1970년대 박정희정권은 적극적인 외화/기술도입정책이 전개하고 수출주도형정책으로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고도성장을 실현하고, 마산과 구미등에 공업단지를 건설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현급수입을 찾은 결과, 마을을 벗어나 도시나 공업단지로의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시의 고용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고수입형농촌경영의 꿈을 포기한 젊은층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는 농촌의 과소화와 노령화를 가속시켰다. 이시기 60세이상의 농림수산업취업자수는 63년에서 65년사이에 5.1%였던 것이, 80년에는 11.2%로 늘어났으며, 2000년에 이르러서는 45.7%로 증가하였다.

<표3>년령계층별 농림수산업취업인구 
년령계층별농림어업취업인구    80  85  90  95 2000
15~59세 N 천명 4,134 3,169 2,471 1,619 1,255
60세이상 O 천명 520 564 766 915 988
15~59세 N/G % 88.8 84.9 76.3 63.9 58.1
60세이상 O/G % 11.2 15.1 23.7 36.1 45.7
농림어업취업인구/농가인구            
15~59세 N/L % 64.0 60.6 60.2 55.5 56.1
60세이상 O/M % 45.7 47.9 64.5 72.9 74.1
자료:한국농림부『농림업주요통계』2001년. 한국통계청『2000년농업센서스』2003년.<深川博史교수제공자료>

공업화사회의 도래는 정부조직을 거대화하고 거대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였으며, 정부와 기업은 적극적으로 농촌유출인구(탈농=세대유출)를 흡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농촌노동력의 도시유출은 당연히 농촌에 심각한 노용력의 부족과 고령화현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1970년대후반이 되어 농촌에서는 농번기 일손부족 현상을 가져왔다. 이는 1960년대까지 농촌의 과잉노동력문제가 정부의 골치거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짧은 기간동안 농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수 있다. 1985년 당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등, 5개도시의 인구 배율이 전국인구의 43.7%를 넘고 있었다. 1967년의 동일5개도시인구비율이 17.4%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시집중비율의 증가는 경이적이다. 사실 공업화의 진전과 함께 이농인구가 도시 또는 그 주변에 집중하는「과잉 도시화」(Over-urbanization)현상은, 마닐라, 쟈카르타, 방콕등의 예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도시집중율은 경이적이다.
(3-5)이렇게 하여, 가족/친족관계가 각지에 확산되고, 근무시간에 구속된 봉급생활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동에 의해, 그 동안 농촌에 기반을 둔 생활스타일과 의식이 변화되었고, 각 개인이 각자의 주관적 만족으로서 행동을 하게 됨으로서 가치관의 다양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구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의 권리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이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써 가족의 역할도 변화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선조제사를 지내는데 곤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그 상징적인 예일 것이다.
여기에서 현재 한국에서 급증하고 「독신생활자」데이터를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논리전개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표4 >한국의 독신생활자수
년도 전체세대수 독신생활자수 전체비율(%)
1985 957만세대 66만세대 6.9
1990 1135만세대 102만세대 9
1995 1295만세대 164만세대 12.7
2000 1439만세대 222만세대 15.4

 이상과 같이, 한국 사회에 있어서 젊은세대를 중심으로 하여 증가하고 있는 「독신생활자」의 현황에서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행 하는 의식 변화의 징조는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된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 모두가 바빠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가치관도 크게 달라져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토지와 주식은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오르는 것이라고 하는 「토지와 주식신화」가 만들어졌고, 또 소비수요는 반드시 확대된다고 하는 「소비확대신화」등이 등장해, 점차 머니게임에 흥청이는 도시민이 출현하므로서, 1970년대이후의 한국적 상황은 1960년대까지의 척도로서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한국사람들의 의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3-6)고향집의 안방에서는 할머니가 손자손녀에게 전해주는 옛날이야기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가끔씩 걸려오는 전화수화기를 통해 손자손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또 각 지역의 향토문화(Local문화)는 크게 변하였다. 필자는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이동함으로서, 농촌의 과잉노동력문제가 해결되고, 농촌의 소득수준이 상승하기 시작하는 1970년대를 「Local문화의 전환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3-7)두번째로 1980년대부터 활발해진 「지역축제」로 시점을 바꾸어 보자. 향토문화제에 대해 일본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그 대표적인 것을 나열해 보면, 「고싸움 놀이」(광주 1월), 「3.1문화재」(영산시 3월), 「진도영등제」(진도4월), 「춘향제」(남원5월), 「전주대사습놀이」(전주6월), 「신라문화제」(경주10월),「안동민속제」(안동10월)등이 있다.
(3-8)현재, 한국전국문화원연합회의 홈페이지(http://www.kccf.or.kr/)등을 참고로 2005년현재 한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지역축제현황을 파악해 보면 약 830개에 달하는 지역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을 기초로 하여 몇가지 통계데이터를 작성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발견된다.

1)지역사회에 있어서의 전통문화의 재발견, 보호, 육성, 재정립 ― 국가에 의한 전통문화의 관리.
2)민족적 아이덴티티구축을 목적으로 지역축제가 조직된것 ― 신라문화재, 삼일문화재등.
3)전통문화에 중점을 문화형태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 – 일본를 포함한 외부 문화에 대한 규제로 인한 외부문화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등장

이상과 같은 필요성에서 정부는 옛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라고 믿고 있던 토착문화를 무형문화재로서 지정하고 많은 보조금을 투입하는 등, 지역축제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행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재위원이 중심이되어 많은 민족문화재를 창조하였으며, 더구나 그것을 문화재로서 지정하기도 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무엇이 전통문화인가를 거론하는 것보다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문화사상이 전통문화로 인식되어 가는가 하는 전통문화의 정착과정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한국사회를 파악할수 있는 길을 제공해 줄것이다.
(3-9) 앞서 지적한 항목이외에 지역축제의 특징으로서 지적할수 있는 것은,
1)국민문화를 구성하는 제지역문화의 발견에 공헌한다는 것.
2)타지역 이해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지역대립감정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
3)1961년 8월에 재정된 관광산업진흥법이후, 관광산업의 상품화에 활용가능 하다는 것.
4)타문화와 차이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여 외국인관광객유치에 적극적인 재료로서 활용가능 하다는 것등도 있다.

(3-10)특히 필자와 같은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각종 출판물이나 텔레비젼광고를 통해 선전되는 이러한 지역축제는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보자. 충청남도 부여시에서 10월에 개최하고 있는 「백제문화제」가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있다.

「백제문화제:고풍적인 행렬에 백제왕조의 꿈과 로망이 피어난다. 일본문화의 원류라고 말해지고 있는 백제문화. 그 부흥을 위한 충청남도 최고의 행렬에서 화려한 역사적풍경을 즐길수 있다. 백제왕비와 공주선발대회, 백제육왕의 추모식, 신성한 색깔의 의상과 당시를 생각케 하는 가마가 볼거리인 왕족의 행렬, 불꽃놀이, 궁도대회가 유명하다」 (『韓国の旅』한국관광공사 2001: 19 일본어판).

여기에서 백제왕비의 의상이나 백제인에 의한 퍼레이드가 현대인이 만들어낸 창조적
인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백제문화를 「관광자원화」 함으로써 국내외의 관광객에게 다른 지역과 차별화를 꾀하고 그 이미지를 정착시킴으로써 집객력을 높이려고 하는 문화생성과정의 현실적인 의도에 주목해야 할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관광팜플렛에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는 「백제문화 그 부흥을 위한 충청남도 최대의 행사」라는 문구에서 행정측이 의도하는 「전통회귀형지역진흥책」이 결국 「전통문화의 부흥」=「전통문화의 창조」를 유발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나 외국으로 부터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부여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비록 일주일간의 짧은 관광행사라고 할지라도 행사에 투입된 정부등에 의한 공적보조금이나 관광수입은 지역경제활성화를 이룩하는 윤활유가 되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지역진흥책의 일환으로서 다양한 민속행사나 역사적지식을 관광자원화 하면서 사람들은 지역적일체감을 다지고 사회적 통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또, 그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3-11) 더욱이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전술한 것 처럼, 1985년에 벌써 5대도시의 인구집중비율이 전인구의 50%에 가까웠다는 것은 생각하면, 고향상실자들이 도시에서 농촌에 일시적으로 귀향하여, 농업적 삶과 농업력을 즐길 수 있는 감각을 지역축제가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노스텔루지아를 제공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더욱이 이농자의 자식들에 있어서는 부모들에게 들은 「고향」, 또는 그림책에서나 본「고향」을 체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12) 원래 지역축제라는 명칭은 중심(도시) – 지역(농촌)의 대립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생성되는 사회적 배경에 도시(중심)의 출현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 했을때, 이 용어의 사회적 생성자체가 한국사회의 변화를 대변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3-13) 1995년 지방자치제의 본격적인 시행을 계기로 하여, 지방자치단체는 지역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관광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이로써 관광자원과 문화자원의 개발이 행해지게 되었다. 「1994년의 한국방문의 해」등과 같은 국가의 정책적인 추진도 있었지만 다른 원인으로서 이하 열거하는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다.

1)마이카시대에 도래 ― 전국 5시간시대가 실현되므로서 집객능력이 높은 관광자원이 필요해졌다는 것― 한국의 재발견.
2)지역의 고유성,독자성의 창출.
3)지역홍보를 위한 축제의 급증.
4)일본의 오이타(大分)현이 제창한 1촌1품운동의 도입에 의한 상품가치의 개발등에 의해, 향토문화의 전람회역할을 하던 향토문화재는 급속히 지역축제로 변모하게 되었다.결국 보는 축제였던것이 구입하는 축제로 변화하였고 나아가 체험하는 축제로 변화해 나가는 듯한 예감을 준다.

(3-14)20세기말, 문화시장의 메카니즘에 정부가 과잉개입이라할 만큼 강력한 규제와 특전을 부여한 결과, 전국의 지역축제중에서 상품화된 향토문화는 그 후 「진열장」에 장식되고 화려하게「Display」되므로서 새로운 형태와 구조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토착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한국근대사의 시간축에서 변화를 거듭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변화의 축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강릉단오제를 지적 할 수있다. 강릉단오제는 한국근대의 문화정책속에서, 토착문화에서 전통문화화로 이행하며, 그후 국민문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상승을 거듭하였다. 놀라운 것은 토착문화에서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과정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국가가 문화정책에 깊게 관여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15)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정부의 문화정책은 「문화육성」 – 「문화보호」 –「문화규제」에 의거한 것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 한국정부는 세계시장에 한국제품의 진출을 꾀하기 위하여, 진출의 첨병으로서 세계각지에 한국문화를 소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한국문화의 세계화라는 슬로건이 그것이다. 한국제상품의 수출은 이러한 한국정부에 의한 문화정책위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강릉단오제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전술한 정부차원의 문화정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4. McDonald화 현상을 띠고 있는 동아시아문화

(4-1)1945년이후,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은 민족문화의 형성을 위한 강력한 문화정책을 실시하여 왔다. 민족문화라는 것은 가능한한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이 대전제가 되었다. 이로서 사회적으로는 강력한 내셔날리즘을 창조해 내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박정희정권에서 건립한「이순신」을 모시는 현충사가 내셔널리즘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4-2)그런데, 최근 수십년만에 세계는 전혀 다른양상을 보이고 있다. 점보제트기가 세계를 날고, 대륙과 대륙이 전화선으로 연결되고, 화페가 국경을 넘어 자유자재로움직이고 있는 현재, 세계 각민족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영원히 획일화되고 균질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 사고인가? 미국에서 발신된 서방의 문명이 위성방송을 매개로 하여 러시아등 동방세계에 유입됨으로서, 십수년전에는 베를린에 구축되어 있던 강력한 동서의 벽마저 붕괴되어 냉전시대가 종언을 고하였다.
(4-3)이렇게 글로벌화의 진행되는 속에서 기업은 세계를 시야에 넣고 보다 효율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지역에서 사업을 전개하게 된 결과, 코카콜라, 펩시콜라, 맥도날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컴퓨터의 기본소프트(윈도즈)등이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맥도널드의 예로서 설명한다. 2002년의 단계에서 맥도널드는 세계 121국에 진출해 있고 약 3만 점포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3,867 점포(2003년 현재), 한국은 324점포(2001년 현재)가 진출해 있다. 세계 어느 맥도널드에 가더라도 동일성을 강조한 규격화된 형태로서 손님을 맞이한다. 예를 들면, 동일한 마크, 표준화 된 점포 디자인, 균일한 서비스(예를들면, 손님에 대한 규격화된 인사법, 주문접수, 주문품의 내용물, 상품제공, 지불방법, 손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등), 동일한 메뉴(Big Mac, Mc shake등), •사이즈, 질, 유니폼, 식기이외에도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냉동식품의 사용과 손님의 웨이터화(손님이 스스로 주문을 하고, 스스로 쥬스를 따르고, 음식을 나르고 청소를 담당하는 것)등을 우리는 용이하게 경험할 수 있다. 맥도날드사는 이러한 기업이념을「QSC&V이념:Q(Quality=신뢰할 수 있는 품질, S(Service=빠르고 기분 좋은 서비스, C(Cleanliness=청결하고 쾌적한 환경, V(Value=부가가치」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맥도널드가 도입한 이러한 판매 시스템이 그 후 많은 패스트 후드산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롯데리아나 버거킹과 같은 햄버거숍이라든지 Denny's등과 같은 훼미리 레스토랑, 그리고 세븐일레븐과 같은 편의점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더구나 이러한 판매시스템은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의식구조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George Ritzer는 막스웨버의 합리화이론 - 예측 가능성, 효율성, 계산가능성, 제어력의 가속적 증대, 비합리성 – 을 도입하여 현대사회와 문화의 「Mcdonaldization」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George Ritzer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pine forge press, 1993.).
(4-4)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 귀에는 귀걸이, 왼쪽손에는 햄버그, 오른쪽 손에는 핸
드폰, 바지는 청바지, 신발은 운동화를 신은 젊은이들의 모습을 일본 뿐만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도시사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집에 돌아가면 포켓몬스타, 닌텐도(게임보이), 슈퍼마리오등의 게임을 즐긴다. 텔레비전게임과 슈퍼훼미콘은 국경을 넘어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동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세계각지에서 발견된다. 생활문화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은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젊은이들의 획일화를 더욱 부추기게 될것이다. 이러한 생활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이유는 단지「멋있으니까」, 「재미있으니까」, 「싫증나지 않으니까」라는 아주 짧은 답변들 뿐이다. 그들의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으며, 숭고한 철학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젋은 이들은 이러한 말을 구사해 기성 세대에 도전을 하고 있다.
(4-5)몇년전부터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세계각지에서 [드래곤볼]이나 [마징가 제트]와 같이 벌써 일본에서는 유행이 지난 어린이프로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한국어등 다양한 언어로서 방영이 되다 보니, 이 애니메이션이 어느나라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도 품지 않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그 원작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등장인물이나 무대등이 지역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 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우주소년 아톰」에서 최근에는「짱구는 못말려」까지 일본제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사이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 「이웃의 토토로」(1988년), 「원령공주」(1997년)등이 아이들의 사이에서 조용한 붐을 만들기도 하였다.
(4-6)사실 이와는 대조적인 만화영화가 아메리카인에 의한 아메리카인을 위해 만들어진「스누피」이다. 전통적인 미국인 기질을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는 20세기 미국적 소비주의의 세계진출과 함께 세계각지로 확대되었다.
(4-7)여기에서 잠시 시점을 바꾸어 글로벌사회가 초래한 문화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제기도 필요함을 지적해 둔다. 첫번째, 어린이들이 만화영화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면, 성인들은 CNN을 보는 습관을 가지는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행숙박처의 대부분의 호텔등에서 위성방송이나 케이블텔레비젼을 통해 CNN을 무료로 수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 CNN에서 흘러나오는 보도가 「균일화된 사실」을 만들고 있다. 물론 단순히 균일화된 사실을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하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아메리카합중국의 국익을 우선한 보도규제 속에서 뉴스가 선별되고 사실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영어를 전제로 한 커뮤니케이션/네트웍을 만들고 있다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영국의 BBC방송이 그러하였던 것 처럼, 아메리카의 CNN방송 또한 영어로 커뮤미케이션이 가능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메리카를 보도의 발신원으로하는 「영어제국주의」라든가 「문화제국주의」라고 불리워지는 용어들이등장하기까지는 그러한 용어들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4-8) 두번째, 현재 「풍요」의 상징으로서 세계경제가 글로벌화를 강조함에 따라, 「도상국」 또는 「미개」, 「秘境」 이라고 불리워지는 지역에까지 「개발원조」 또는 「경제원조」라는 명목으로 자금제공이 이루어짐으로써 Digital-Media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영어를 매개로 한 정보와 시스템의 획일화현상을 구축/ 침투시킨다는 것은 간단히 예측할 수 있다.
(4-9)세번째, 2001년11월, 미국동시테러사건을 계기로 하여 발생한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나라인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아프카니스탄과 탈리반정권도 Digital-Media를 통한 정보전을 연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메디아의 획일적인 보급은 양극단의 획일적인 사실을 만들어 냄으로서 세계적 긴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지적을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4-10)이러한 글로벌리즘의 폐해를 다룬 것으로는, James L. Watson이 맥도날드식의 글로벌리즘에 저항하는「로컬리즘」의 실태를 보고하고있다. (“Golden Arches East:Mcdonald's in East Asia ”Sanford University Press, 1977). 또한, 일본의 테리야키버거, 인도의 양고기 버거, 그리고 맥너겟 등은, 글로벌리즘과 지역주의의 충돌을 의미하는 좋은 예이다.
(4-11)글로벌화가 진행되는 현재, 다문화주의가 강조되는 사회적 배경은 민족이나 국가단위로 파악되고 있는 고립적인 문화관을 비판하고 문화를 상호교류적인 어스펙트로서 고찰하려는 학문적 풍토에 의한 것이다. 아울러 컬츄럴 스터디가 강조하는 것처럼 서양 문명 중심의 문화관을 비판하고, 문화적 평등을 강조하는 입장이 등장하였다는것 또한 지적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5. 하이브리드(Hybrid)화하는 한일문화

(5-1) 20세기말 부터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로서, 한일의 문화시장은 커다란 역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5-2) 그 서막은 2000년 1월에 일본에서 상영된 「쉬리」에 의해서였다. 영화 「쉬리」는 이미 한국에서 250만의 관객동원에 성공하였고, 일본에서도 당초 수입배급회사의 예상을 뒤업고 110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히트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차례 텔레비젼을 통해 소개되었다. 쉬리가 일본에서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제작자는 그 의도를 한반도의 특수한 정치사항인 남북의 대립이라고 테마로 했다고 하였지만, 영화를 본 일본의 관객들은 이구동성으로 「템포의 빠름과 스릴에 흥분했다」고 이야기하였다.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일류의 작품이라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국」이라는국적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한편, 2000년 8월에는 서울에서 약 만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일본인그룹인 「챠게와 아스카」가 일본어로 콘서트를 행함으로서 국내외에 화제가 되었다. 또 2000년에서 2001년에 걸쳐, 한국내에서 공개된 일본영화 「Love Letter」에 등장하는 대사중의 하나인 「Ogenkidesuka(건강하세요?)」는, 비록 일본어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도 깊은 인상 남겼다. 서울의 어떤 대학에서 행한 앙케이트에 의하면, 총인원 125명 중 118명이 「Ogenkidesuka(건강하세요?)」라는 대사를 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2001년 조사)
(5-3) 벌써 영화나 음악, 패션등 많은 분야들이 한일의 문화시장에 있어서는 바다를 건거 하나가 되고있고, 자유로운 시장 메카니즘이 구축되고 있다. 한일의 인터테이먼트분야에 있어서, 한일 최초의 프로젝트에 의해, 일본인 두명과 한국인 한명으로 결성된 Y2K라든가, 한국,일본, 중국 국적의 3명이 결성한 그룹 SES, 그리고 가수 보아의 활약은 엔터테이먼트세계에 있어서, 확실하게 양국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만약 시대를 거슬러 10년전쯤이라면, 한국최고의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일본인이 라이브콘서트를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에서 활약하는 조용필, 김연자, 보아등이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한국인이라서가 아닌, 그들이 가진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5-4)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에 있어서 한일 문화교류의 벽이 공식적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1998년 10월에 한일정상회담에서의 공동선언을 기초로 하여,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일본대중문화개방을 선언하였고, 이로써, 영화, 비디오, 만화등의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1999년 3월에 한국의 일간스포츠신문은 일본만화를 연재하였다. 2000년 6월에 한국정부에 의한 추가조치가 발표되어, 일본민요 콘서트도 전면적으로 해금되었고, 만화영화의 일부상영도 허가되었다. 하지만, 아직 일본 민요 CD의 판매는 금지되어 있는 상태이고, 텔레비젼등과 같은 메스컴에서는 일본의 오락프로그램등의 방영또한 허용되지 않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는 한국문화에 대한 문화규제가 없었고, 이로서 쌍방향의 문화적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거의 없어진 것이 되는 셈이다.
이 한일쌍방향의 흐름을 저지하는 장벽이 없어진 사례로서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한국드라마, 영화등이 제작되기 시작되었고, 한일양국이 스토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예를들면,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다」는 한국영화 「파랑주의보」로, 일본텔레비젼드라마 「Pure soul-네가 나를 잊어도」는 한국영화 「내머리속의 지우개」로 리메이크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 한일간에 행해지고 일부문화에 대한 정치적 규제는 과연 앞으로 얼마나 그 유효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문을 갖게된다. 한일간의 지리적인 근접과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 그리고 위성방송을 통한 일본 방송의 유입에 인터넷의 출현등은 이러한 규제들을 이미 형골화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5)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동아시아의 엔트테이먼트부문을살펴보면, 잡지나 광고, 텔레비젼분야에서 중국이나 홍콩, 일본, 한국출신의 「아시안 탤렌트」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고, 이러한 점등에서 벌써 문화는 탈국경화가 시작되어 「유동화」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6)이전 중국과 한국등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異문화(일본문화등)의 유입규제가 실시되어왔다. 하지만 국제적인 문화활동과 자본이동이 활발해짐으로서 문화를 둘러싼 환경이 보다 글로벌화되고 경쟁상대가 일국에 그치지않고 전세계가 라이벌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은 문화네셔널리즘이 지향해온 문화경쟁제한을 골자로 하는 문화규제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길수 있는 문화의 질적 향상을 위해 문화유입과 자유화의 추진이 보다 생산적인 방향이 될것이다.
(5-7)따라서, 이후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유동화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1)문화시스템의 건전성을 확보-유동적인 재문화간의 경쟁이 높아지면질낮은문화나 청소년에게 유해한 악질문화의 규제-와 2)문화보존, 관리, 개발 인프라의 구축 및 규칙의 정비라고 하는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6. 나가면서

(6-1)이상의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세기후반 한국의 문화적 상황은 정부의 강력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매스컴보도와 문화수입을 제한하며 강력한 문화적 벽만들기에 노력을 경주했다. 이는 식민지와 전쟁에 의해 파탄된 산업과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국가는 문화를 통해 동질성을 주입함으로서, 강력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확립을 획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민족적동질성 내지는 순수성을 상징하는 민족문화로서 각종의 문화적 요소가 총동원되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국가적 아이덴티티와 정치적목적달성을 목적으로 자민족문화의 순수배양이 강조되었던 시기가 20세기 후반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다음과 같은 2중구조의 문화도식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表5>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문화도식


(6-2)그런데, 필자가 강조하는「문화의 균일화」(Mcdonaldization) 현상은 비단 현대적인 문화현상만은 아니다. 대항해 시대에 있어서의 유럽문화가 아프리카대륙, 아메리카대륙, 아시아로 유입된 것 또한 중세판 글로벌리즘이다. 단순히 맥도널드나 코카콜라라고 하는 제품의 유행만으로 글로벌리즘은 현대가 낳은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상이지만, 중세부터 근세까지의 동아시아에 있어서의「동아시아 중화사상 공유권의 형성」(후루타 히로시) 또한 「균일화된 문화적 현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확산되고 그 후 조선•일본으로 침투한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자의 통치 사상으로서 활용됨으로서 아시아는 중화사상이라는 문화적 균질화를 이미 경험하였다. 결국, 문화의 균질화와 유동화는 현대인만의 경험이 아니라 어느시대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필자의 기본적 개념 모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6>필자의 기본적 개념모델

균일화된 문화
     국민문화
     전통문화


물론 글로벌사회로 진전이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적 상황은 여전히 문화적 경계를 강조하며, 어디까지나 전통 문화나 국민 문화에 아이덴티티의 기초를 요구하는 사회적세력이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까지 필자가 설명한 것과 같이 국경과 같은 인위적인 경계를 초월하여 균일화된 문화로 자신을 성형하거나 또는 상업주의적 문화수출을 통해 자신의 문화를 사회적으로 균일화 시키려는 세력또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따라서 현재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문화적 형성은 일견 상반되는 두개의 사회적 세력이 복잡한 상호관련성을 가지면서 새롭게 구축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3)필자의 작업가설: 이상을 고려하였을 때, 21세기의 한국,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 3국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여 「문화 경쟁」→「문화 공생」의 시대에 돌입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그 Key Word는, 「국민문화 육성→전통•국민문화 보호→외래문화의 규제→전통문화의 Big bang•세계화→외래문화의 규제완화→다문화의 경쟁→다문화공생→→문화적 하이브리드」로 전개될 것이다.


 
(6-4)2002년3월에 완성된 한일IT인프라정비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부산과 후쿠오카가 기가비트급의 국제해저케이블로 연결이 되면서 인터넷 서비스 프로바이더(Internet Service Provider)간에 고속IX(Internet Exchange)와, 프로드 밴드어프리케이션의 전개을 위한 실용적인Quality Of Service기능, 그리고 멀티케스트통신기능, 고도의Contents Delivery Network기능이 제공되었다. 대용량이며 고속의 「정보하이웨이」가 한일양국을 연결하게 됨으로서, 양국민을 합쳐서 약400만명에 달하는 사람의 왕래(2004년도 방한 일본인수, 2,426,837명: 2005년도 한국 통계청자료. 방일 한국인수 159만명, Jnto 국제 관광 백서 2004년도판)와 678억 달러(한국→일본 217억 달러, 일본→한국 461억 달러)」(2004년도, 외무성 북동 아시아과편「한국 경제의 현상과 일한 경제 관계」)에 달하는 물류의 유통과 더불어 양국간에 비약적인 정보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간에 Digital Business Belt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국제Business와 Cultural Contents의 국제유통이 개시되었다. 이러한 광케이블을 통한 교류는 한일간 뿐만아니라, 가까운 장래에는 각지역간에도 네트웍이 형성되리라 예측한다. 이러한 국제고속네트웍이 완성되면, 동아시아는 문화의 유동화가 가속화되어, 그 결과 문화의 도태, 선별이진행되는 문화경쟁시대가 본격화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국경을 초월한 정보의 흐름이 한일간의 문화적 거리감을 급속히 좁혀줄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5) 유감스럽게도, 현재 일본의 교육실정은 한국고대사는 물론 근대사조차도 충분히 가르치고 있지 않은 탓에, 일본 총인구의 50%를 점하고 있는 30세이하의 젊은 층은 이승만, 박정희대통령의 이름조차도 모르는 실정이다. 더구나, 젊은 층의 대다수는 한일합방조차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실정을 앞에 두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역사의 무지에격분하는 분들도 있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이 없게도, 이렇게 일본의젊은 층에게 이미 정착해 버린 역사적인 공백이, 반대로 「한국=공포정치」라는 이메지를 불식시키고, 김치와 불고기, 그리고 맛사지와 쇼핑을 위한한국여행의 유행(2000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은 210명에달한다고 한다)을 창조하고, 동대문시장의 심야쇼핑을 즐기면서 「한국=낙원」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6-6) 너무 낙관적인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한중일 3국이 문화경쟁, 문화공생, 문화하이브리드 시대에 돌입하게 되면, 자국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배타적인 내셔날리즘에 의해 규제, 보호를 받던 이전시대와는 달리, 새롭고 우수한 문화창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21세기형 문화규칙」을 창조는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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